제목 | 12월11일 복음묵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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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노우진 | 작성일1999-12-10 | 조회수2,12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율법 학자들은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거룩한 변모, 빵의 기적, 오시기로 된 메시아 즉, 사람의 아들이 당할 수난에 대한 예고를 체험한 제자들은 과연 "이분이 누구이신가?라고 의문을 제기하게 된다.
그들의 의문은 더욱 증폭되고 율법학자들의 구약에 대한 해설을 통해 예수님께 의문을 제기한다.
즉, 말라기 예언서 4,5-6의 말씀이다.
"이 야훼가 나타날 날, 그 무서운 날을 앞두고 내가 틀림없이 예언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엘리야가 어른들의 마음을 자식들에게, 자식들의 마음을 어른들에게 돌려 화목하게 하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세상을 모조리 쳐부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그 예언자 엘리야는 이미 오셨고 제자들은 그분의 설명을 듣고 그 예언자가 바로 세례자 요한임을 알아차린다.
메시아의 도래를 예고하는 예언자 엘리야 아니 세례자 요한! 오늘날 나의 상황 안에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을 하고서 나에게 예수님의, 하느님의 다시 오심을, 현존을 깨닫도록 목놓아 외쳤던, 자신의 삶으로 증거했던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또한 예수님은 이어서 그 예언자가 벌서 왔으며 고난을 받았고,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도 역시 고난을 받으리라고 가르치신다.
우리가 만일 그분의 사명을 행하고자 한다면, 이 땅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해야할 일이 있다면 바로 ’고난 받는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그분이 그렇게 하셨기에...
조금은 극단적일 지모르지만 만일 우리가 이 시대에 세례자 요한으로 살아가길 진정으로 원한다면 명예, 부, 안락은 어쩌면 너무도 요원한 일일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삶을 사는 이들이 고난이 따르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글쎄 과연 그들이 진정한 예언직을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수련 시설을 짓고, 청소년 단체를 설립하고 그들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나는 많은 경우에 그들이 청소년들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 눈이 멀어있는 모습을 접하게되었다. 얼마나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던지.. 그리고 과연 우리는 이렇게 밖에 할 수 없나? 하는 회의마저 들때도 있었다.
자신의 소명에 따라 사는 삶은 가시돋힌 장미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 보이나 그속에 날카롭게 돋힌 가시는 나의 몸을 찌르는 고통을 안겨주니 말이다. 그 고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나의 소명이라는 굳은 믿음이 아닐까? 그리고 "그분이 그 길을 가셨기에... "하는 조금은 바보같은(?) 우매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 행복은 그분의 방법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바오로 사도는 "고통속에서도 기뻐하라"라고 말씀하셨나보다.
좋은 하루 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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