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강아지와 이방인
작성자김용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0-02-10 조회수2,616 추천수8 반대(0) 신고

 

성서말씀 : 2월 10일 목요일 매일미사 (마르코 7:24-30)

 

 영적으로 부족해서인지, 무지함 때문인지 가끔씩 성서말씀을 읽고는 실망 또는 반감을 느낄 때가 있다. 오늘의 성서말씀(마르코 7:24-30)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였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과 악령 들린 어린 딸을 고치러 온 여인과의 대화는 그 이면에 담긴 뜻이 무엇이든 간에 묘한 반감을 일어나게 한다.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하신 예수님의 거부의 말씀과  "선생님, 그렇기는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라는 이방인 여인의 대답 모두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 힘들게 느껴졌다.

 

스스로 강아지로 낮추는 여인의 대답에서 느끼는 반감은 그 비굴한 말 자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그나마 자식을 살리고 싶은 급한 마음에 그런 대답을 하였겠지 하는 동정과 이해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에 대한 느낌은 그것과 다르다.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심한 차별을 하실 수 있는가? 사람을 강아지로 부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실망과 함께, 마치 자녀들은 유태인, 강아지는 이방민족 사람들이라는 인종 차별적인 표현을 하신 것처럼 느껴져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예수님께서 설마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라고 다시 생각해 보려 했지만, 무언가 억지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 예전에 그랬듯이 묵상을 그만 두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돌려 오늘의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1장의 말씀을 읽는데, 문득 솔로몬왕이 다른 신들을 섬겨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강아지는 혈통으로 구분한 이방민족이 아니라 하느님대신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을 말하시는 것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복음 속의 예수님 말씀이 다르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느님 대신 다른 것에 매달리는 자들에게 내가 해 줄 것이 무엇이겠느냐.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지 않았느냐?"   

 

곧 이어서 복음에 나오는 그 여인의 대답을 가지고 묵상을 다시 시작하였다.

 

 온 부족이 하느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곳에서 사는 한 여인. 오래 전부터 어린 딸아이에게 악령이 들려 발작을 하지만 더 이상 손 쓸 곳이 없다. 자신들이 믿는 신께 밤낮없이 빌고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어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데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들의 신을 배신했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몰래 집을 나선 여인이 예수님 앞에 당도하여 도움을 청하는데 그 분은 모질게 거절하신다. "자녀에게 줄 것을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

 

  내가 그 여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질 때면 바쳤던 기도와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실컷 세상 것에만 몰두하다가 한순간 마음을 바꾸어 드렸던 그 기도와 약속들을 또 할 것이 아닌가?

 

  "도와주신다면 이제부터 우리 부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고 야훼 하느님만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라고 한 여인의 대답.  자신이 속한 부족을 떠나지 않는 한 지킬 수 없는 약속 대신 있는 그대로 매달린 그 여인의 대답을 비굴한 것으로 보다니.   그것은 비굴한 것이 아니라 진실함과 떳떳함으로 받쳐진 한 어머니의 사랑이고 아름다움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에 찌든 크리스챤인 나보다 이런 이방인 여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깨달음을 준 묵상이었다.  제   목  : 강아지와 이방인

성서말씀 : 2월 10일 목요일 매일미사 (마르코 7:24-30)

묵   상  :

 영적으로 부족해서인지, 무지함 때문인지 가끔씩 성서말씀을 읽고는 실망 또는 반감을 느낄 때가 있다. 오늘의 성서말씀(마르코 7:24-30)도 그런 것 중에 하나였다.

 

  오늘의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과 악령 들린 어린 딸을 고치러 온 여인과의 대화는 그 이면에 담긴 뜻이 무엇이든 간에 묘한 반감을 일어나게 한다.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하고 하신 예수님의 거부의 말씀과  "선생님, 그렇기는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라는 이방인 여인의 대답 모두가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기 힘들게 느껴졌다.

 

스스로 강아지로 낮추는 여인의 대답에서 느끼는 반감은 그 비굴한 말 자체에서 비롯되었는데, 그것은 그나마 자식을 살리고 싶은 급한 마음에 그런 대답을 하였겠지 하는 동정과 이해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예수님 말씀에 대한 느낌은 그것과 다르다. 모든 이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이런 심한 차별을 하실 수 있는가? 사람을 강아지로 부른다는 것 자체에 대한 실망과 함께, 마치 자녀들은 유태인, 강아지는 이방민족 사람들이라는 인종 차별적인 표현을 하신 것처럼 느껴져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졌다. 예수님께서 설마 그런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아니겠지라고 다시 생각해 보려 했지만, 무언가 억지스러움이 있는 것 같아 예전에 그랬듯이 묵상을 그만 두고 말았다.  

그리고 눈을 돌려 오늘의 제1독서 열왕기 상권 11장의 말씀을 읽는데, 문득 솔로몬왕이 다른 신들을 섬겨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그러면 그렇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강아지는 혈통으로 구분한 이방민족이 아니라 하느님대신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을 말하시는 것이지’ 라는 생각과 함께 복음 속의 예수님 말씀이 다르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느님 대신 다른 것에 매달리는 자들에게 내가 해 줄 것이 무엇이겠느냐.  믿음이 너를 살렸다 하지 않았느냐?"   

 

곧 이어서 복음에 나오는 그 여인의 대답을 가지고 묵상을 다시 시작하였다.

 

 온 부족이 하느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곳에서 사는 한 여인. 오래 전부터 어린 딸아이에게 악령이 들려 발작을 하지만 더 이상 손 쓸 곳이 없다. 자신들이 믿는 신께 밤낮없이 빌고 매달렸지만 소용이 없어 죽는 날만을 기다리는데 예수님의 소식이 들려왔다. 자신들의 신을 배신했다는 말을 들을까 두려워 남편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몰래 집을 나선 여인이 예수님 앞에 당도하여 도움을 청하는데 그 분은 모질게 거절하신다. "자녀에게 줄 것을 강아지에게 줄 수 없다."

 

  내가 그 여인이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감당 못할 일이 벌어질 때면 바쳤던 기도와 하느님께 드렸던 약속들은 어떤 것이었는지.  실컷 세상 것에만 몰두하다가 한순간 마음을 바꾸어 드렸던 그 기도와 약속들을 또 할 것이 아닌가?

 

  "도와주신다면 이제부터 우리 부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고 야훼 하느님만을 따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고,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 먹지 않습니까"라고 한 여인의 대답.  자신이 속한 부족을 떠나지 않는 한 지킬 수 없는 약속 대신 있는 그대로 매달린 그 여인의 대답을 비굴한 것으로 보다니.   그것은 비굴한 것이 아니라 진실함과 떳떳함으로 받쳐진 한 어머니의 사랑이고 아름다움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위선에 찌든 크리스챤인 나보다 이런 이방인 여인을 더 사랑하신다는 깨달음을 준 묵상이었다.  

                                        -성서묵상 나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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