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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연중7주일강론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2-19 조회수2,844 추천수9 반대(0) 신고

연중7주일강론(마르 2,1-12)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르 2,5).

 

이 세상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잘못된 신앙관을 하나만 딱 지적하라고 하면 나는 서슴없이 지나친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죽는 순간까지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면 갈수록 더 많은 죄를 지을 가능성이 많은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할머니가 고백성사를 할 때 ’사는게 다 죄지요’라고 하는 고백을 나도 더욱 가슴으로 동감해 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한 눈동자가 더욱 부럽다. 또 차라리 젊은 시절 한없이 방황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지 밤새워 고민하던 시절이 차라리 아름답게 느껴진다.

 

요즈음은 주님 앞에서 기도하면 더욱 겸손해 지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좀 더 젊었을 때 한창 열심히 살려고 할 때는 내가 죄를 지으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는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신념에 꽉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 자신이 삶의 기준이었고, 남이 잘못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오만방자한 모습이었는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아마도 누구나 처음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경험을 하였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밝히기 싫은 고백을 해본다.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나 작물들은 조금만 날씨가 춥거나 가물어도 시들시들 해진다. 그러나 엄동설한을 이기고 곧 대지를 뚫고 솟아날 성당 앞의 잔디는 웬만큼의 추위와 가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서 여름내내 푸른 초원을 선사해 줄 수 있다. 우리의 믿음도 단련을 받으면서 자라야 하는 것 같다. 시련을 이겨 낸 사람은 생명의 월계관을 받을 것(야고 1,12)이라는 말씀처럼 세상 속에서 자신의 믿음은 시험을 거쳐야 하는가 보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지으면서 산다면 그 죄를 어떻게 용서받아야 하는가? 또 아무리 고백성사를 보아도 똑같은 죄를 지으면서 과연 신앙생활을 계속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차라리 지금과 같이 죄를 지으려거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마음이라도 편할 것이 아닐까? 물론 죄를 짓지 않고 살면 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또 그런 사람은 성당에 다닐 필요도 없도 우리 같은 신부도 존재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우리가 어짜피 짓고 살아야 하는 죄마저 용서받을 기회가 없는 우리들로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고쳐주시는 능력을 보여주신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권능을 가지신 분이신데 아무리 수십년동안 중풍병으로 누워있는 환자라고 하더라도 말씀 한 마디로 못고칠 분이 아니시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하면 너무 이야기가 싱거워지고 당연한 기적으로 생각되고, 우리하고는 관계없는 말씀처럼 생각될 수 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실 때 중풍병자 자신의 믿음으로가 아니라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자 지붕를 벗겨내고 그를 밧줄에 달아서 내린 네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용서해주신다. 이것은 우리가 짓는 죄를 반드시 우리 스스로 다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가르쳐 준다. 중풍병자는 스스로 병을 고치겠다는 의욕조차 상실한 폐인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이런 경우를 수없이 경험할 수 있다. 내 스스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절망감에서 죽고 싶을 때 누군가 내가 다시 일어나기를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힘을 얻는다. 작년에 몸이 아파서 쉴 때도 우리 본당 교우들이 밤낮으로 기도하며, 내가 다시 본당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염원한 덕분에 용기를 얻고 빨리 회복될 수 있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 서로 기도해 주는 일이다. 소화 데레사 성녀의 간절한 기도 덕분에 절대로 회심하지 않던 사형수가 형집행을 받는 순간에 죄를 용서받고 천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는 우리 자신들이 신앙체험이 될 수 있다. 내 스스로 용서받으려고 애쓰는 신앙에서 서로 서로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합심해서 기도하는 모습을 우리 주님은 더욱 잘 들어주실 것 같다.

 

또 중풍병자가 나은 것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프면 우선 약부터 찾고 그래도 낫지 않으면 병원으로 같다. 그런데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즉 마음에 평화가 깨진 것이 원인이 되어서 온 몸의 기가 정체되고 결국 육체에 질병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육체의 질병을 치료하면 마음에 평화가 오리라고 믿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육신의 고통을 없애는 것도 중요하다. 그래서 암환자에게 마약을 투여해서 고통을 진정시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치료가 아니다. 진통제는 통증을 낫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뇌를 마비시켜서 고통을 잊게 해준다. 진통제를 과용해서는 안된다. 나중에 아무 약도 듣지 않는다.

 

예수님은 중풍병자가 지붕에서 내려오자 병을 고쳐주시지 않고 죄를 용서해 주신다. 하느님으로부터 천벌을 받았다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 사람은 사람들로부터도 손가락질을 받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처음에는 병을 고쳐보려고 했을 테지만 이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포자기 했을 것이다.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는 비참한 그를 보신 예수님은 그에게 삶의 희망을 전해 주신다. 그가 지은 죄가 모두 용서받았다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이것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이 어디있겠는가? 죄의 무게를 떨쳐 버리고 마음으로부터 삶에 대한 희망이 솟아난 그는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수년 아니 수십년 동안 누워있어서 냄새에 찌든 요를 들고 걸어서 집으로 갔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보다 우리 같은 죄인을 반겨주신다. 특히 스스로 자신의 죄 때문에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용서를 베푸신다.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신 주님은 째째하지 않으시다. 이런 죄는 용서해 주고 저런 죄는 용서해 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조건을 내세우지도 않으신다. 친구 덕분이든 누구 때문이든 어쨌든 그분만 찾아가면 돌아온 탕자처럼 따스하게 맞이해 주신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들은 다 없던 일로 해주신다. 성서에 나오는 중풍병자만 죄사함 받고 병고침 받는 것이 아니다. 지금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괴로워하며 하느님을 멀리 떠나려고 하는 바로 나 자신을 용서해 주시는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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