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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일미사에 빠지면 대죄인가?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3-04 조회수5,294 추천수33 반대(0) 신고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

 

종교생활이 인간에 주는 두 가지 역할이 있다. 그 하나는 우리에게 유익함을 주는 순기능이고, 다른 하나는 해악을 가져다 주는 역기능이다.

 

먼저 순기능으로 우리 그리스도교는 인간에게 원초적으로 남아있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특히 죽음은 거대한 공룡처럼 인간에게 밀어닥치는 미지의 세계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니이체는 이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서 초인(Ueber Mensch)이 나타나야 한다고 절대적으로 생각했었고, 석가모니는 깨달음을 얻으면 죽음이 주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7년간의 긴 고행을 했다. 공자는 죽은 조상에 대한 공경을 절대화함으로써 삶과 죽음이 결코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가르치기도 했다. 이토록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이들이 죽음에 대한 과제를 해결해 보려고 하였다는 것을 보면 진정 죽음이야 말로 넘지 않으면 안되는 거대한 걸림돌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죽음을 피하지 못했지만 예수만은 죽음을 뛰어넘음으로써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절망으로 보였던 죽음을 부활의 희망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때문에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우리 신앙인들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욥같은 비참한 고통을 당해도, 천형이라는 문둥병에 걸려도 예수를 믿는 이들은 영원하게 살 수 있다는 기쁨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죽어있으나 살아있으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바오로 사도의 신앙고백처럼 죽음은 더 이상 인간에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는 죄와 죽음의 징벌이라는 두려움 속에서 살던 인간에게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줌으로써 인간을 구원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만물 속에는 신령한 기운이 깃들어 있을 거라는 미신 때문에 하느님이 아니라 피조물을 숭배하는 미신행위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만이 창조주이며, 아무리 신령해 보인다고 할지라도 모든 피조물들은 한갖 하느님이 만드신 것이며 인간에게 관리하도록 맡겨주신 것임을 깨닫게 됨으로써 잡다한 미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인간의 품위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피조물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살아오던 삶에서 벗어나 만물의 조물주이신 하느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참다운 삶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즉 우리 그리스도교의 순기능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고, 하느님을 진정으로 주님으로 경배하도록 함으로써 혼돈 속에서 살던 이 세상이 창조때의 그 질서를 되찾도록 해주는 결정적인 유익함을 주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의 역기능, 즉 그 폐해가 또한 만만치 않다는 것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종교가 인간에게 참다운 자유와 해방을 가져다 준 반면에 극도의 자기중심주의에 빠져들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종교생활에 열심히 빠져들면 들수록 많은 이들은 스스로 자기 안에 갇히게 되고 결국 자기가 만든 하느님을 믿게 된다. 이것은 종교가 정해 놓은 율법과 온갖 계명들을 절대화하려는 성향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종교가 자신들만의 규율들을 정하게 되는데 고등종교일수록 계명들의 숫자가 적고, 신흥 사이비 종교일수록 그 숫자가 더 많다. 신흥종교가 온갖 특이한 계명들을 많이 만드는 이유는 그래야만 스스로 특별한 종교로 구별될 수 있고, 그 구성원들이 남과 다른 복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자위를 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냉정히 따져보면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도 이런 요소들이 너무 쉽게 유산으로 내려오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안식일 계명, 오늘날에는 주일미사에 참례해야 한다는 계명이다.

 

안식일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이 쓰여졌을 정도로 유대교에서 이 계명은 중요하다. 본래 그리스도교의 뿌리격인 유다교는 성전중심적인 종교였다. 그래서 일 년에 한 번씩 성인 남자들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제사를 드리러 가야했다. 그런데 기원전 586년에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는 민족적인 치욕을 당한다. 성전예배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아서 이런 고난을 받는다고 가르치게 된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학자들은 창세기를 기록함으로써 하느님이 6일동안 창조하고, 7일째 되는 날 쉬셨으니 이날은 거룩하게 지내야 한다고 가르치게 된 것이다. 안식일을 지켜야만 다시 고국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너무 절대절명의 율법으로 받아들여졌다. 또 안식일 계명은 남의 나라 땅에서 유대인들만의 독특성을 나타내기 위한 상징이었고, 이방문화와 유대교 신앙의 차별성을 강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렇게 해서 생겨나기 시작한 율법중심주의는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 칙령으로 유대인들이 고국에 돌아오게 되면서 성전예배가 부활되지만 예전같은 기능은 하지 못하게 된다. 그 후 알렉산더 대왕이 희랍제국을 세우면서 각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는 포용정책을 펴게 되자, 이방인들의 문화에 동화되는 사람들이 증가됨에 따라 유대교는 혼합종교로 전락할 위험에 처하게 된다(마카베오 상하권 등은 이런 배경에서 생성된 성서이다). 그러자 유대교는 율법의 테두리를 확장하여 613개나 되는 방대한 율법을 만들게 된다. 이렇게 되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율법의 계명들을 지키면 되는 것으로 바뀌게 되다. 이제 율법은 절대화되어하느님을 밀어낼 정도로 신성화된다.

 

이런 현상은 예수가 태어나서 활동하던 시대에 더욱 극성을 부렸는데, 이 때문에 율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율법학자는 부화 명예를 차지하게 되었고, 율법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바리사이들은 특별한 부류로 행세를 하고 있었다. 성전중심에서 회당중심으로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율법준수야 말로 하느님 백성인지 아닌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예수는 활동해야 했다.

 

이렇게 율법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면 안식일 계명을 가지고 예수와 바리사이파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위해서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예수는 사람을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이라는 정반대의 의식은 그렇게 간단하게 화해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예수를 걸고 넘어지려는 나쁜 마음에서 바리사이파가 시비를 걸어온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양심에 따라서 행동했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바리사이들이 신앙생활을 엉터리로 했기 때문에 예수가 실랄하게 비난하였을 것이라고 믿는다. 아니다. 우리 중에 아무도 이들만큼 더 열성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을 보지 못한 것 같고 나도 그렇게 살 자신이 없다. 그러면 이들은 왜 욕을 먹는 못된 무리로 등장하는가?

 

그 이유는 이들이 율법을 적당히 지켜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신봉을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식일은 누구나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니었다. 가난해서 하루 하루 벌어먹는 이들은 안식일에도 일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수십 가지로 세분화된 수많은 계명들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었던 이들은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죄인으로 분류되었으며 하늘나라에도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서 더욱 자신들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위하며 살았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에 대한 사랑은 있지만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그러니까 안식일 계명이 결코 소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이들에 대한 자비로운 마음과 측은지심이 결여되어 있기에 안식일 계명의 이해에 대한 오류를 가르치고 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런 바리사이파적인 생각은 오늘날 우리 교회 안에서 뿌리깊게 남아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주일미사에 빠지면 대죄를 짓는다는 교리를 귀가 따갑도록 듣고 자란 우리 신앙인들에게 이제 올바른 가르침을 베풀 때가 온 것 같다. 지금 전체 한국 천주교 신자들 중에 주일미사에 참예하는 사람들은 30%가 안된다. 또 서구 교회에는 이미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고 일생에 단 세 번(세례, 혼배, 장례) 성당에 가 본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교회가 주일미사 의무를 궐하면 대죄라는 가르침을 계속해서 고집해야 할 것인가?

 

현대 사회는 다원화 세분화 되어가고 있다. 그래서 주일에도 일하지 않으면 이 사회는 심각한 혼란에 처하게 된다.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인들, 대중교통을 담당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처 생각할 수 없는 수많은 분야에서 주일에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일해야 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시대에도 과거 농경시대에나 통할 수 있는 주일미사 의무를 그리스도교의 절대계명으로 내세운다면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죄인으로 양산하는 불행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내가 사목하고 있는 본당은 전형적인 농촌, 산골본당이다. 신자 200여명에 주일미사에 130여명이 참석하니 출석률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농한기 때는 문제가 없는데 농번기인 4월부터 10월까지는 심각한 현상이 일어난다. 부임한 첫 해에 부활절 미사 후 다음 주일부터 신자가 절반도 안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 것인지 겁도 났다. 그러나 가정방문을 하면서 아침 5시부터 저녁 9시에 끝나는 농사일을 특성을 알게 되며 이해하게 되었다. 도시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지만 농촌은 아직까지 함께 일하는 공동체로 남아있다. 아무리 기계화가 되어있다고 해도 품앗이로 일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다. 그렇다 한 마을에 교우들끼리만 사는 것도 아니니 신자들은 비신자들과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만일 신자가정의 일에는 비신자들을 불러다가 일을시키고, 주일이라고 해서 신자는 주일미사 의무를 참석해야 한다고 성당으로 간다면 그것이 올바른 신앙생활의 모범일까? 자신은 주일미사에 참석했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았다고 위안을 받을지는 몰라도 하느님께서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어려움은 외면하는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사람으로 보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때부터 나는 위험스러운 여지가 남아있고, 악용될 소지도 있지만 농번기 때 주일미사 참석을 관면해 주었다. 또 주일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혼인, 회갑잔치, 장례 등으로 미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다고 선포해 버렸다. 그리고 주일날 어쩔 수 없이 빠지게 될 때,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로 대송을 해도 좋고, 그것도 못할 때는 그날 하루를 열심히 일하면서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지향으로 지내달라고 했다. 이런 마음으로 주일을 지내고 난 다음에는 고백성사를 보지 않고도 미사에 참석해서 영성체를 할 수 있다고 수없이 강론 때마다 강조했다.

 

처음에 이런 강론을 들은 신자들은 의아해 하고, 항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뜩이나 주일에 적게 나오는데 옳다구나 하면서 안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오지 않을 사람이나 못 나올 사람이나 주일미사 빠지기로 한 사람은 하느님도 못말린다. 그러니 이들에게 죄의식을 남겨주어서 아주 하느님을 멀리하느니, 오히려 편안하게 주일을 일하거나 놀게 해주고 싶었다.

 

그 후 신자들의 신앙생활이 어떤지는 그 마음 속에 들어가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 하지만 주일에 빠진 사람들은 평일 미사에라도 나오려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보고는 교회가 신자들을 너무 유아적으로 가르쳐오지 않았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주일은 주님의 날이다. 일주일에 하루를 쉰다는 것은 자신의 육체적인 휴식 뿐만 아니라 영적인 재충전을 위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런데 이런 중요한 가르침은 외면한 채 일주일 168시간 중에 단 1시간 주일미사에 참석했다고 해서 마치 신자로서의 의무를 다했다고 자만하며, 주일미사에 참석하지 않은 형제나 자매가 영성체 한다고 시비를 건다면 이시대의 또 다른 바리사이파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 이 강론은 한 사목자의 사적인 의견입니다. 이 글 읽고 동감하거나 반대하는 분들과 함께 자유로운 토론을 했으면 합니다. 굿뉴스자유게시판을 이용하시면 더욱 좋겠지요. 감사합니다. 부시맨 신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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