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참된 단식(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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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3-10 | 조회수2,25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00, 3, 10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 묵상
이사야 58,1-9ㄱ (참된 단식의 뜻)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목청껏 소리질러라. 네 소리, 나팔처럼 높여라. 내 백성의 죄상을 밝혀 주어라. 야곱 가문의 잘못을 드러내어라. 그들은 나를 날마다 찾으며, 나의 뜻을 몹시도 알고 싶다면서, 마치 옳은 일을 해 온 백성이기나 하듯이, 자기 신의 법을 어기지 않은 백성이기나 하듯이, 무엇이 옳은 법인지 나에게 묻고 하느님께 가까이 나가고 싶다면서 한다는 소리는, '당신께서 보아 주시지 않는데 단식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당신께서 알아주시기 않는데 고행은 무엇 때문에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단식일만 되면 돈벌이에 눈을 밝히고 일꾼들에게 마구 일을 시키는구나. 그렇다. 단식한다는 것들이 시비나 하고 싸움이나 하고 가지지 못한 자를 주먹으로 치다니, 될 말이냐? 오늘 이 따위 단식은 집어치워라. 너희 호소가 하늘에 들릴 리 없다.
이 따위 단식을 내가 반길 줄 아느냐? 고행의 날에 하는 짓이 고작 이것이냐? 머리를 갈대같이 구푸리기나 하고 굵은 베를 두르고, 재를 깔고 눕기나 하면 그것으로 다될 듯 싶으냐? 그게 이른바 단식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주님께서 이 날 너희를 반길 듯싶으냐?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만 하면 너희 빛이 새벽 동이 트듯 터져 나오리라. 너희 상처는 금시 아물어 떳떳한 발걸음으로 전진하는데 주님의 영광이 너희 뒤를 받쳐 주리라. 그제야, 네가 부르짖으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리라. 살려 달라고 외치면, '내가 살려 주마.' 하리라."
마태오 9,14-15 (단식에 대한 질문)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묵상>
사순시기하면 여러가지 떠오르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회개, 단식, 금육, 고행, 통회, 죄, 죽음, 십자가...
이러한 단어들을 통해 다가오는 느낌들이 있습니다. 힘들다, 고통스럽다, 암울하다, 캄캄하다, 가라 앉아있다...
여하튼 즐겁고 유괘한 기분과는 거리가 먼 느낌들입니다. 이러한 느낌들을 가질 때 우리는 위축되기 쉽습니다.
우리가 행동하는 양식은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한다'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동 양식과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행동 양식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적극적인 행동 양식보다는 소극적인 행동 양식에 따라 움직이기 쉽습니다. 따라서 사순 시기에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은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기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이 회개와 보속의 행위로 사순시기, 특히 재의 수요일과 성 금요일에 '단식'을 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단식'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눈으로 보면 단순히 '무엇을 먹지 말라.' 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러기에 '단식'은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지켜야만 하는 강제적인 규정으로 받아들여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단식은 '먹지 말라'라는 강제 규정이 아니라, '무엇을 행하여라' 라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단식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 주고 멍에를 풀어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 주는 것,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 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굶주림의 고통을 느끼기 위해 단식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에게 베푸셨던 완전한 사랑을 나누기 위해 나보다 못한 처지에서 고통을 당하는 이웃에게 나의 것을 나누려고 단식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렇게 나의 것을 나누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내는 것 자체가 참된 단식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단식은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기쁨에 넘치는 자발적인 행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사순 시기 동안 침통한 표정으로 '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저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식으로 소극적인 삶을 살아가기를 결코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당신 사랑의 선포자가 되어 힘차게 이웃에게 나아가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자신의 인간적인 만족이나 위안을 얻기 위한 겉모양만의 단식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단식을 할 수 있는 힘을 주님께 기도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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