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순 3주일 강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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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3-23 | 조회수1,998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사순 3주일 강론
"이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요한 2,19)
예수님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혹시라도 요한복음의 서문(1,1-1,18)을 일고 나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 아버지와 함께 하신 분이시니, 성전이 아무리 웅장하고 화려하다고 해도 눈 깜박할 사이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억지로 해석하는 분도 있을 지 모르겠다.
초기 교회 시대에는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에는 문자 그대로 믿는 안티오키아 학파와, 그 문자가 나타내는 의미를 이해하려는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있었다. 성서를 해석하는 이 두 경향은 지금도 공존하고 있는데, 우리 교회의 해석법은 언제나 두 경향의 중도적인 노선을 따른다. 그래서 성서가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열심히 읽고 쓰는 운동을 많이 하고 있지만, 만일 안티오키아식으로 성서를 문자 그대로 믿는다면 지금 개신교회처럼 수많은 분열을 초래할 수 있어서 절대로 금할 일이고, 또 알렉산드리아식으로만 이해한다고 하면 성서의 권위와 역사성은 땅에 떨어지게 되어 일반적인 철학서나 윤리교과서처럼 취급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오늘 복음 말씀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당신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모님에 의해서 봉헌되었고, 해 마다 한 번씩 유다인들처럼 성전을 방문하셨으면서 말이다.
오늘 복음을 읽어보면 유다인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화가 나셔서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큰 소리 치신 것으로 나온다. 예루살렘 성전이 어떻게 지은 것인데 장사소굴이 되었다고 허물어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빌론 유배의 치욕을 겪어야 했었다.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유다인들은 조국을 잃은 근본 원인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들은 선민으로서 영원한 축복을 보장받았는지 알았는데 바빌론 제국의 무력 앞에 무참히 그 오만한 마음이 무너져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국을 잃은 슬픔보다도 하느님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지 못하는 설움을 더 못견뎌했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들의 신앙의 메카였고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남의 나라 땅에서 노예로 살면서 성전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되자 회당을 만들어서 예배를 드리며 신앙을 유지해 가게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그들이 의지할 것은 하느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제 2의 신명기운동이 벌어졌다. 하느님의 계명은 수많은 율법으로 분류되는데 오늘 제 1독서(출애 20,1-17)의 십계명은 이런 역사적인 상황 속에서 탄생하였다. 그러니까 모세오경(창출레민신)은 바빌론 유배 후에 유다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재점검하는 과정에서 쓰여졌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이방인 문화 속에서 성별된 민족으로 계속 남아 있으려면 무엇인가 특별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삶이라고 확신했다. 출애굽기를 지은 저자는 이 십계명을 지켜야 되는 이유를 역사적인 사건을 회상시키면서 당시 유배를 당한 유다인들에게 가르치려고 하였다.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에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출애 20,1)라고 하면서 십계명에 대한 역사적 타당성을 제시하였으니 그 어느 누가 이에 대해서 반대할 수 있었겠는가?
유다인들은 바로 이 십계명을 중심으로 유배생활을 이겨냈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자 그토록 염원하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게 된다. 이제 그들은 성전제사만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오히려 율법을 지키는 일이야 말로 다시는 바빌론 유배 같은 민족적 치욕을 당하지 않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십계명을 중심으로 613개나 되는 수많은 작은 율법들이 제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전은 다윗이 계약의 궤를 올겨와서 천도를 한 다음에는 유다인들의 삶에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성인 남자가 되면 해마다 한 번 이상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서 희생제사를 봉헌해야 했다. 특히 유다인들이 에집트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놓은 유다인들은 죽이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는 것을 기념하는 축제절기인 과월절에는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던 것이다(요한 2,13).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소굴로 변했으면 안가면 그만이지 왜 애써서 지은 것을 허물어 버리라고 하셨을까?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 더러워서 피하는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은 장사소굴로 변한 것만이 아니라 부패형 권력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수많은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있었다. 성전에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수많은 사제들이 살고 있으면서 제사를 봉헌하였다. 이 제사는 레위기에 나오는 것처럼 희생제사로서 자신의 죄를 사함받는 것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죄를 씻어버리기 위해서는 제사를 바치지 않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종교적인 것을 이용해서 사제계급들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반대로 대다수의 백성들은 희생제물을 바칠 수 없게 되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들로 전락하고 있었다.
지방의 회당에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가난한 백성들을 죄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면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희생제사를 이용하여 사제계급들이 백성들의 영혼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니 성전이 하느님의 집이니, 기도하는 곳이니 하는 본래의 정신은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 뻔한 일이다.
요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가나에서 혼인잔치의 기적을 보여주신 후 곧 예루살렘 성전정화를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공관복음(마태 21,12-13; 마르 11,15-18; 루가 19,45-46)에는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기에 있었던 사건으로 기록하면서, 요한복음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공관복음 보다 요한복음에서 성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유다인들을 적으로 규정한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못된 무리로 등장한다. 그러나 공관복음에서는 일반적인 유다인 보다는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개인 같은 특수한 계층이 예수님을 공격하고 있다. 그러니까 공관복음이 기원후 60-70년 경에 쓰여졌다고 보는데, 이 때만 해도 예루살렘 성전은 건재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요한복음은 기원후 90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보는데 이 때는 이미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으로 성전은 무너져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리고 공관복음이 쓰여졌을 때는 초기 교회가 유다교와 완전히 결별하지 않고 있었다면, 요한복음이 쓰여졌을 당시에는 이미 초기 교회가 유다교와 완전히 헤어져서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던 시대였다.
이렇게 역사적 상황을 살펴 볼 때, 오늘 복음 말씀의 올바른 의미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예수님이 살아생전에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셨을 때 성전이 장사소굴이 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화가 나셔서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셨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래야 안티오키아식의 성서해석법도 수용하게 되니까 말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미 예루살렘 성전이 초토와 된 것을 목격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즉 건물이 성전은 허물어졌지만 예수님의 죽음과 사흘만에 부활하신 사건으로 영적인 성전이 다시 세워졌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런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다고 믿었던 유다인들의 신앙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신 것이다. 성전이라는 장소에 가야 하느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고 믿었던 유다인들의 생각을 공격하신다. 이제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장소에 관계없이 하느님을 영적으로 예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내용을 우리는 예수와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요한 4,1-24)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배드리던 산(4,20)도 아니고 예루살렘(4,21)에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육적인 생각으로는 하느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없다. 하느님은 영적인 분이기 때문에 누구나 참되고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만이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4,24).
우리의 신앙을 오늘 말씀에 비추어서 반성해 보자. 전 세계에는 10억 이상의 가톨릭 신자들이 있고, 우리 나라에는 35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인으로 살아간다. 개신교 형제들까지 합치면 1000만이 훨씬 넘는다. 그리고 우리는 주일에 적어도 30% 이상이 성당에 간다. 그런데도 이 세상은 조금도 복음화 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오히려 더 어두운 시대상황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소금과 등불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이 사회의 어느 구석에서 말없이 살아가고 있기에 이만하다고 자위해 보지만, 점점 미래에 대한 희망보다는 절망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성당 안에서는 천사처럼 착한 마음을 갖고 살겠다고 결심해 보지만, 성당 문을 나서자 마자 내가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잃어버린다. 차를 몰고 도로에 나가보면 알 수 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사람이 바보로 취급되기 십상이다.
성당에 가서 미사 참석하는 것만이 신앙생활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세상에 대한 육적인 몸은 죽고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하느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 언제 어디서고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하느님의 자녀인 것이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성당 안에만 하느님이 계시다고 믿고, 성당에 가야만 기도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곰곰히 새겨보자.
그리고 이제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자. 성당 안에서의 천사같은 마음을 성당 밖에서도 버리지 않으려고 노력해 보자. 아마도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오시면 다시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지 않을까 두렵다. 우리 성당은 46년 걸려서 짓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3년간 정말 정성스럽게 지었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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