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랑의 이중계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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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나성묵 | 작성일2000-03-30 | 조회수3,454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마르코 12. 28-34
29, 31절: ".. 첫째가는 계명은 이것이다. ... 우리 하느님은 유일한 주님이시다. .. 너의 하느 님을 사랑하라. 또 둘째가는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는 것이다."
십자가 모습: 사랑의 이중 계명
우리를 구원하시러 오신 예수님의 마지막 모습은 수직선과 수평선의 교차로 이루어진 십자 가 형태로써 나와 하느님, 그리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다. 십자가 모양 그대 로 하느님과 나는 수직 관계로서 나는 저 밑에 있고 하느님은 저위에 계신 분이다. 허지만 나와 이웃과의 수평 관계를 통하여, 당신은 그 위에서 내려오시고, 동시에 저 밑에 있는 나 를 끌어 올려 이웃 속에서 당신과의 만남을 이루시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비슷한 생각으로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본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하느님을 모르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주위 에서 크리스챤이 아니지만 이웃을 사랑하는 많은 비 신자들을 보아왔다.)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같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웃 사랑이 전제되지만,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이 전제되는 것이 아니다. 즉 하느님을 섬김은 이웃을 사랑하게 만들지만, 이웃 사랑이 꼭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 것이다." 라고.
한 노모에게 딸이 여럿 있다. 여러 딸 중 주로 둘째와 셋째가 노모를 극진히 모시는데 이 두 딸은 상반되는 점이 많다. 둘째는 오래 전부터 교회와 신앙에 관심을 가지고 살았으며, 여러 면으로 적극적이고 이웃에게 아주 잘하지만 그의 눈밖에 나면 가끔 차가워지기도 하는 사람이다. 그는 노모를 모시는 정성으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한다. 셋째는 교회와 신앙에 대 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하고 항상 언제 어디서나 이웃 사랑 하는 데는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신앙에 눈뜨게 되었다. 이 두 딸을 지켜 보면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참으로 신비롭다는 것을 다시 느낀다. 둘째에게 노모는 하 느님 사랑의 대리자요, 세째에게 노모는 하느님 사랑의 인도자인 것 같다. 나는 연로하신 어머님을 어떻게 모시고 있는가 생각해 본다. 또 그분은 나에게 어떠한 분이 신가 질문해 본다. 나 자신의 노후를 비춰주는 예언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연로하신 어머님께 잘해드리지 못하니 가슴이 쓰리고 무거워진다. 어머니 모습에서 훗날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두려워지기도 한다.
주님, 저의 이 쓰리고 무겁고 두려운 마음이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의 마음으로 바꾸어지도 록 당신께 청하옵니다. 당신의 사랑을 통해 어머니를 더 잘 모실 수 있도록, 어머니를 참된 사랑으로 모실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고 이 사랑을 통해 당신께 더 가까이 닥아 갈 수 있도 록 은총 내려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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