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 머무름, 기쁨(부활 5주 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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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5-25 | 조회수3,509 | 추천수10 | 반대(0) 신고 |
2000, 5, 25 부활 제5주간 목요일 복음 묵상
요한 15,9-11(나는 참 포도나무)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해 왔다. 그러니 너희는 언제나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묵상>
예수님께서는 지상에서의 당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 대해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쉼없이 말씀하십니다. 요즈음 매일 듣는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의 이러한 다급함을 느낍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예수님 말씀을 참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요한 복음 사가가 의도적으로 삭제했는지는 모르지만, 제자들의 반응이 거의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이미 뵈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필립보가 엉뚱하게도 아버지를 보여달라고 보챌 뿐입니다(요한 14,7-8).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타내 보이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가리옷 사람이 아닌 다른 유다가 왜 세상에는 나타내 보이지 않으시고 자기들에게만 나타내 보이려고 하시는지 물을 뿐입니다(요한 14,21-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왜일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벽창호같은 제자들에게 끝임없이 말씀하시는 것일까?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대화를 그만두는 것이 상식인데, 예수님은 어떤 이유로 계속해서 말씀하시는 것일까?
오늘 복음에서 그 해답을 찾습니다.
"내가 이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
참된 기쁨은 자신 안에 가두어 둘 수 없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퍼주고 싶고, 자신도 모르게 퍼주게 되는 것이 참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아직 잘 모르고 있는 기쁨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 기쁨은 분명 예수님의 기쁨이었지만, 예수님만의 기쁨이 아니라 예수님에 의해서 믿는 이들에게 나누어져야 할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기쁨을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쁨이란 무엇일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무름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달리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 기쁨은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기쁨입니다.
문득 예전 교회 청년 운동할 때가 생각납니다. 88년인지 89년인지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본당 청년연합회장을 하면서 지구 청년연합회를 재건하기 위해서 다른 본당 청년회장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처음 본 얼굴, 다른 생활, 낯설기 그지 없었지요. 그러나 이러한 낯설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만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서로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그렇게 변해있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신앙의 형제 자매임을 보았을 뿐입니다. 서로가 가지고 있던 신앙인 고유의 기쁨을 확인했을 뿐입니다. 이 날 이후에 친오빠처럼 따르던 다른 본당 회장 한명이 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묻더군요. 어디서 그런 열정과 힘이 생기느냐고 말이죠. 별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아니 말로 표현하지 못했다고 해야 더 옳을 것 같네요. 말로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 마음에서 올라오는 굳은 믿음과 희망, 기쁨이 있었습니다. 굳이 표현하자면,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기쁨,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려고 간절히 염원하는 그 기쁨이 바로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무엇을 열심히 해서 얻는 기쁨이 아니라, 그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기에 느끼는 기쁨, 예수님과 함께 하기에 느끼는 기쁨이 이 기쁨일 것입니다. 바로 이 기쁨이 있어야 무엇인가 열심히 해 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어떤 일이나 행동의 결과입니다. 사랑하기에 기쁘고 성과가 있기에 기쁜 것이죠. 그러나 믿음의 기쁨은 이 것으로 인해 다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생명을 바치는 값진 희생까지 말이지요.
그러기에 믿음의 기쁨을 간직한 신앙인, 하느님과 함께 하는 기쁨을 간직한 신앙인은 결코 자신의 일이나 행동이 기대에 못미친다고 해도, 자신이 만나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해도,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항상 이 기쁨을 가지고 있을 수 만은 없을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 기쁨을 생각하면서도 가슴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 놓일 경우가 더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때때로 무덤덤한 신앙 생활에 지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상처를 받고 아파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럴 때 오늘 복음 말씀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쁨을 잃고 살아가는 우리보다 이러한 우리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더욱 아프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하루 "내 기쁨을 같이 나누어 너희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예수님을 간절히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을 되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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