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슬픔이 기쁨으로(유스티노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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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6-01 | 조회수2,494 | 추천수12 | 반대(0) 신고 |
2000, 6, 1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복음 묵상
요한 16,16-20 (너희의 슬픔이 기쁨으로)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자 몇몇 제자들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되리라든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든지 하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하고 순군거렸다. 그러면서 그들은 "'얼마 안 가서'라는 말씀이 무슨 뜻인가? 무슨 말씀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묻고 싶어하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얼마 안 가서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 한 내 말을 가지고 서로들 논의하고 있는 것이냐?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묵상>
만남은 기쁨을 줍니다. 헤어짐은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예상하지 않은, 원하지 않은 헤어짐은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줍니다. 그러나 헤어짐 후의 만남은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예상하지 않은, 원하지 않은 헤어짐 후의 만남은 슬픔을 말끔히 씻어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에게는 예수님과의 헤어짐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는 헤어짐 후의 만남입니다. 영원한 만남입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떼어놓을 수 없는 만남입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기쁨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1990년에 있었던 비참한 사건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문이 닫힌 단칸방에서 불에 타 숨진 어린 남매의 죽음을 말입니다. 이 시대의 십자가였습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억누를 수 없는 비통함과 자책감을 느끼게 했던 헤어짐입니다.
어린 남매의 부활을 생각했습니다. 얼어붙은 우리 마음에 불을 놓으신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이미 사람들에게 잊혀진 이 어린 남매를 다시 떠올려봅니다. 이 어린 남매를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참 기쁨을 삶 안에서 느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1990년에 가수 정태춘 씨가 이 사건을 배경으로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썼습니다. 신문기사의 낭송과 사실적 묘사로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충격성과 비극성을 잘 살리고 있는 이 작품에 대해 공윤은 "어떤 가정의 부주의가 우선된 불행한 사례를 굳이 이념적 사회문제로 결부한 것은 대중가요로서 부적당하다'는 이유로 전면개작 지시를 내렸습니다.(이영미, [정태춘], 도서출판 한울, 1991, 36쪽) 이 작품의 가사 전체를 적어 봅니다.
우리들의 죽음
(낭송) "맞벌이 영세 서민 부부가 방문을 잠그고 일을 나간 사이 지하 셋방에서 불이나 방 안에서 놀던 어린 자녀들이 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고 질식해 숨졌다. 불이 났을 때 아버지 權씨는 경기도 부천의 직장으로, 어머니 李씨는 합정동으로 파출부 일을 나가 있었으며 아이들이 방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방문을 밖에서 자물쇠로 잠그고, 바깥 현관문도 잠가 둔 상태였다. 연락을 받은 이씨가 달려와 문을 열었을 때, 다섯 살 혜영 양은 방 바닥에 엎드린 채, 세 살 영철 군은 옷더미 속에 코를 묻은 채 숨져 있었다. 두 어린이가 숨진 방은 3평 크기로 바닥에 흩어진 옷가지와 비키니 옷장 등 가구류가 타다만 성냥과 함께 불에 그을려 있었다. 이들 부부는 충남 계룡면 금대2리에서 논 900평에 농사를 짓다가 가난에 못이겨 지난 88년 서울로 올아 왔으며, 지난해 10월 현재의 지하방을 전세 4백만원에 얻어 살아왔다. 어머니 李씨는 경찰에서 "평소 파출부로 나가면서 부엌에는 부엌칼과 연탄불이 있어 위험스럽고, 밖으로 나가면 길을 잃거나 유괴라도 당할 것 같아 방 문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평소 이씨는 아이들이 먹을 점심상과 요강을 준비해 놓고 나가 일해왔다고 말했다. 이들이 사는 주택에는 모두 6개의 지하방이 있으며, 각각 독립구조로 돼 있다."
(노럐) 젊은 아버지는 새벽에 일 나가고 어머니도 돈 벌러 파출부 나가고 지하실 단칸방에 어린 우리 둘이서 아침 햇살 드는 높은 창문 아래 앉아
방문은 밖으로 자물쇠 잠겨있고, 윗목에는 싸늘한 밥상과 요강이 엄마, 아빠가 돌아올 밤까지 우린 심심해도 할 게 없었네
낮엔 테레비도 안 하고 우린 켤줄도 몰라 밤에 나오는 테레비도 남의 나라 세상 엄마, 아빠는 한 번도 안나와 우리 집도, 우리 동네도 안나와
조금만 창문의 햇볕도 스러지고 우린 종일 누워 천정만 바라보다 잠이 들다 깨다 꿈인지도 모르게 또 성냥불 장난을 했었어
배가 고프기도 전에 밥은 다 먹어치우고 오줌이 안 마려운데도 요강으로 우린 그런 것 밖엔 또 할 게 없었네, 동생은 아직 말을 잘 못하니까
후미진 계단엔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고 도둑이라도 강도라도 말야 옆방에는 누가 사는지도 몰라 어쩌면 거긴 낭떠러지인지도 몰라
성냥불은 그만 내 옷에 옮겨 붙고, 내 눈썹, 내 머리카락도 태우고 여기 저기 옮겨 붙고 훨, 훨 타올라 우리 놀란 가슴, 두 눈에도 훨, 훨
방문은 꼭꼭 잠겨서 안 열리고 하얀 연기는 방 안에 꽉 차고 우린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만 흘렸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낭송) 엄마, 아빠! 우리가 그렇게 놀랐을 때 엄마, 아빠가 우리와 함께 거기 있었다면...
(낭송) 우린 그렇게 죽었어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 있었다면... 아니, 엄마만이라도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 우리가 방 안의 연기와 불길 속에서 부둥켜 안고 떨기 전에,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 방문을 세차게 두드리기 전에, 손톱에서 피가 나게 방 바닥을 긁어대기 전에, 그러다가 동생이 먼저 숨이 막혀 어푸러지기 전에, 그 때, 엄마, 아빠가 거기 함께만 있었다면... 아니야, 우리가 어느 날 도망치듯 빠져나온 시골의 고향 마을에서도 우리 네 식구 단란하게 살아 갈 수만 있었다면... 아니, 여기가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축복을 내리는 그런 나라였다면... 아니, 여기가 엄마, 아빠도 주인인 그런 세상이었다면... 엄마, 아빠! 너무 슬퍼하지 마 이건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엄마, 아빠의 잘못이 아냐 여기, 불에 그을린 옷자락의 작은 몸둥이, 몸둥이를 두고 떠나지만 엄마, 아빠! 우린 이제 천사가 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거야 그런데 그 천사들은 이렇게 슬픈 세상에는 다시 내려 올 수가 없어 언젠가 우린 다시 하늘 나라에서 만나겠지 엄마, 아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배운 가장 예쁜 말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어 엄마, 아빠... 엄마, 아빠... 이제, 안녕... 안녕...
오랫만에 속으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슬픈 마음을 억누르며 가사를 적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너희는 울며 슬퍼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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