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께서는 다가오셔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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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순자 | 작성일2000-06-01 | 조회수2,326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대구 평화방송 1999, 10, 26, 화, 찬미예수님. 5월 20일에 첫 묵상을 띄운후 두 번째 묵상이 좀 늦은 감이 있군요. 앞으로는 일주일에 한 편씩은 꼭 띄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독서 방법에 대해서는 5월 20일자 "왜 나를 떠보는거요"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8. 16-20
16열한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곧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일러 주신 산으로 갔다. 17그들은 그분을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을 품었다.
18예수께서는 다가오셔서 말씀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
19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보시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성서의 모든 작은 에피소드들이 그 복음서의 전반적인 맥 안에서 읽혀져야 하듯이, 이 이야기는 28장 전체와 관련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28장에서는 예수님 부활이 어떻게 점차적으로 계시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예수님 부활을 믿지 않을 수 없게 한 성서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것을 다 다룰 수는 없으니까 이 기록중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열한 제자들은 갈릴래아로, 곧 예수께서 자기들에게 일러 주신 산으로 갔다. 17그들은 그분을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을 품었다.>>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갈릴래아 산 위에서 발현하신 이 이야기는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발현 모습이나, 예수님과 제자 사이의 상봉의 장면에 대한 별다른 묘사가 없습니다. 그들 간의 대화도 없습니다. 다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땅에 엎디어 절을 했다는 사실과 이것과 대비적으로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만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보고 땅에 엎디어 절한 사람들과 보고도 믿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절은 했으나 믿지않은 사람들도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묵상해 볼 것이 있겠으나, 각자 묵상하기로하고 그냥 넘어가기로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다가오셔서 말씀하시어 그들에게 이르셨다. >> 이 기록에서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행동만이 얘기됩니다. 그 분께서 제자들에게 다가오시고 말씀을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을 가까이서 관찰해봐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제자들에게 다가오시지요? 엎드려 절하고 있는 제자들, 더러는 그래도 의심하고 있는 그러한 제자들에게 다가오십니다. 왜? 토마 사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자신을 만져보게 하시려구요? 부활하신 당신을 더 가까이서 보고 확인시키시기 위해서입니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요. 그분이 가까이 다가오신 것은 다만 그들을 전도를 위해 파견한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세세 대대 우리의 세상 끝날까지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확인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 안에서 무엇들을 얘기하시는지 자세히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 19"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능을 받았습니다. 19그러므로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보시오, 나는 세상 종말까지 어느 날이나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
이 말씀의 내용은 예수님의 하늘과 땅에 대한 전권 선언과, 전도명령, 그리고 현존에 대한 약속, 이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내리신 전도명령에 대한 말씀 위에 머물러보겠는데, 이것이 오늘 우리 독서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 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 이 기록의 말씀에 의하면, 파견의 유일한 목적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기, 즉 제자 만들기입니다. 제자로 삼는다는 것은 당연히 복음 전파를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록 안에서의 예수님 말씀을 보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들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만드는데 늘 내가 함께 하여 거들겠다’라고만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제자로 만든 후에 해야할 것을 먼저 말씀하신 다음 현존의 약속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자로 삼아서 해야할 일이란 무엇인지요? 기록된 말씀을 꼼꼼히 읽어 보셔요. 그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일’과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치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세례와 가르침이 짝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세례만 주라는 것도 아니고, 가르치기만 하라는 것도 아니다. 이 둘을 다 해야하는 것입니다.
세례란 하나의 의식입니다. 의식이란 실용적 차원이 아니라 상징적 차원이지요. 그런데 상징적 차원에로 들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동물의 수준을 벗어나 인간의 수준으로 상승 또는 승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말하자면 상징적 행위란, 말하는 인간 즉 언어행위를 하는 인간의 전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란 인간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하는 의식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 삼위의 이름 아래 구성되는 하나의 몸의 지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내가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이 내 안에서 구체적인 하나의 몸을 갖게된다는 것이지요. 세례받은 모든 나라들은 그들의 종족이나 문화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또 개개인들은 그들의 성격이나 모든 환경,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름, 즉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아래 한 몸을 이루는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야할 것이 또 있습니다. 가르침입니다. 가르침에 관한 내용이 분명히 얘기되고 있습니다. 곧 "내가 명한 것을 다 지키도록 가르치시오"입니다. 제자들이 지켜야할 행동강령(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에 관한 총체적인 모든 지식을 전수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가르침 곧 명을 실천하는 것이 그분의 자녀가 되는 조건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세례와 가르침이 자녀가 되는 필수조건인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집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은, 우리는 흔히 이 말씀을 접할 때에, 이 가르침의 문제는 흘려버리고, 전도 문제만 강조하기가 쉽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이 복음독서를 할 때마다 늘 그렇게 해왔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주기만이 전도의 전부인 것처럼 자칫 착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안에는 세례와 가르침이 같은 비중으로 얘기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에 가르침이 동반되어야만 진정한 제자가 되고 성숙된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얘기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한국 교회는 세례주기에만 너무 급급해하지 않는지? 반성을 촉구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세례도 중요하지만, 그와 꼭 같은 비율로 신자 즉 제자 재 교육이 필수적임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예수님께서는 겉모양 제자만들기나 세례자 숫자 늘이기의 경쟁 속에 빠질 위험이 있는 교회를 미리 내다보시고 우려하셨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세례만 받은 제자로 끝나버리는, 믿음의 뿌리가 내리기도 전에 교회를 떠나버리는, 그래서 진정한 자녀가 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을 미리 보고 염려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우리 교회 사목자가 할 일에 대해서 보다, 우리 각자가 스스로 해야할 자기 재교육에 대해서 반성해 보고자 합니다. 신자 재교육의 책임이 교회 행정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우리 각자는 영세받은 후 자기 재교육에 얼마나한 시간과 열정을 쏟았는지? 어느 정도의 영적 독서를 하고 있는지? 성서를 읽는지? 얼마나? 하느님에 관해서, 예수님에 관해서, 참 신앙을 위해서, 참 자녀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가르침의 기회를 허락했는지? 알아야 실천 할 수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과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의 타자가 나의 영원한 신비이듯이, 예수님의 존재는 더더욱 우리가 결코 이 세상에서는 그 정체성에 대해 다 밝힐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잘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성서일 것입니다. 성서를 찬찬히 읽어보세요. 그러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물론 예수님 찬미라는 말을 안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게되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그 분의 사상이나 행동을 흉내내고 싶어지지 않겠습니까?
자 이제 말씀과 친숙하게 데이트를 해보셔요. 예수님께서 그 데이트를 먼저 청하시고 또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하겠노라>>
시가 있는 풍경: 이지희 (헬레나)
내게 먼저 당신이 다가와 손을 내미셨습니다
당신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났을 때 함께 있겠다고 굳은 약속을 했습니다
처음처럼
매번 처음처럼, 나도 함께 하고프다고 믿음의 뿌리 하나 움켜잡지만
당신의 향기 하나 담지 못하고 스러져만 갑니다
처음처럼 매 번 당신과 함께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읽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무엇인가 속삭여 오는 어떤 목소리가 들리는지요? 들린다면 그것은 말씀이 형제님에게 또는 자매님에게만 보내는 개별적인 득별한 신호입니다. 거기에 응답하세요. 그것은 묵상이며, 기도일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달리 말하자면 곧 말씀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하느님의 참 모습을 알아가는 순간이며 나의 진짜 모습이 보여지는 순간일 것입니다.
앞으로, 이 지혜 헬레나 자매님의 기도의 시를 매 묵상 끝에 올리겠습니다. 성서를 읽는 기쁨과 말씀과의 새로운 만남을 함께 나누고 싶은 박 세실리아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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