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을 의식하는 삶(알로이시오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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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6-21 | 조회수2,352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2000, 6, 21 성 알로이시오 곤자가 기념일 복음 묵상
마태오 6,1-6.16-18 (자선, 기도, 단식에 대한 가르침)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일부러 남들이 보는 앞에서 선행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한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말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기도할 대에도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그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얼굴을 하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고 얼굴에 그 기색을 하고 다닌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들은 이미 받을 상을 다 받았다. 단식할 때에는 얼굴을 씻고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그리하여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고 보이지 않는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묵상>
누군가를 의식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요즈음 일어나는 이런 저런 사회 문제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 문제의 핵심에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독불장군, 안하무인과 같은 의식과 삶의 방식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격 훈련을 중지시키기 위하여 매향리 농섬에 사제와 학생이 들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섬 상공에서 공포탄을 쏘며 위협을 가하고 이들을 강제로 연행해 간 미 공군과 경찰 당국의 횡포에서, 그리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이루어지고 있는 의사 폐업 사태에서, 이러한 씁쓸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속마음이야 어떻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선행을 베풀고, 기도를 하며, 단식을 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위선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런 위선적인 행동으로 상처를 받고 피폐해지는 것은 위선적인 행동을 한 사람이지, 다른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선행을 베푸는 사람을 보면 선행을 베풀고 싶어집니다. 그 사람의 의도가 불손하더라도 사실 그 의도를 알아채리는 것이 쉽지 않을 뿐더러, 설사 그 의도를 알았다 하더라도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선행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더 큰 반성을 하게 됩니다.
기도를 하는 사람을 보면 기도를 하고 싶어집니다. 어떤 의도로 기도하는지, 무엇을 기도하는지 알수는 없지만, 적어도 외면적으로나마 하느님과 함께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를 새삼 떠올려보게 됩니다.
단식 등의 방법을 통해 절제와 극기의 덕을 닦아가는 사람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과 마음을 추스리게 됩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살아가려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여 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절제와 극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위선을 하는 사람은 자신을 이중 생활의 노예, 상대방의 평가라는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반응에 전전긍긍하는 노예로 만들어 자유를 잃게 만듭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끊임없이 위선의 쳇바퀴를 굴려야 하는 불쌍한 처지가 되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방되는 길은 바로 하느님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반응을 인간적인 감각으로 감지하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현실에 젖어 살아가는 사람들은 비록 신앙인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을 하시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꾸밈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의식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해 외적으로 무엇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해 무엇인가를 한다면 위선의 대상이 사람에게서 하느님으로 바뀔 뿐 위선이 참된 선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또다른 굴레로 덧씌워 노예로 만드시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하느님은 참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님 모두가 생활 안에서 항상 하느님을 의식함으로써 참된 자유의 삶, 참으로 선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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