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행복한 십자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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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6-23 | 조회수3,359 | 추천수31 | 반대(0) 신고 |
행복한 십자가 대화성당에 처음 부임해서 월요일에 새벽 미사를 드리는데 신자는 바오로 할아버지 한 분 뿐이셨다. 너무 추워서 그런가 하며 미사를 드리는데 혼라스러운 순간이 있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할 수가 없어서 순간 당황한 나는 "주님께서 할아버지와 함께" 하며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다. 시골에 살고 있는 신부들은에게 이런 일은 흔히 겪는 일일 것이다. 요즘 같은 농사철에는 열심한 레지오 단장님들 조차도 바쁘셔서 평일미사에는 나오지 못하시고 할아버지 두 분과 할머니 세 분만이 미사의 단골손님이다. 이분들도 글을 읽을 수 있지만 눈이 어두우셔서 미사해설은 물론이고 1독서 화답송 알렐루야 복음을 내가 다 읽는다. 생각해 보면 원주의 주교좌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있을 때는 미사 때마다 내가 신부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는 내가 신부라는 의식을 갖고 산다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차츰 시골본당의 이러한 어려운 사정에 적응하면서 무기력하게 사목생활을 해서는 않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제에 대한 관념을 이 성당의 상황에 맞게 바꾸었다. 즉 70% 이상이 할아버지 할머니 신자로 구성이 되어 있는 것을 감안해서 신부 보다는 자식노릇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농번기 시작 전 봄과 농번기가 끝난 가을에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성지순례 겸 효도관광을 하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온천에 들려서 서로 때를 밀어주고, 버스 안에서는 한 데 어울려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이왕 효도하는 거 본격적으로 하자는 생각에서 2박 3일 동안 제주도에 효도관광을 다녀온 적도 있다. 자식들도 못하는 일을 본당신부가 모시고 가니 20여 분이 같이 가셨다. 나는 자칫하면 제주도에서 장례미사를 해야 할 지도 모른다는 각오를 하고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시고 김포공항으로 나섰다. 비행기에 오르기 위해서는 활주로를 왕복하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생전 처음 공항에 와 본 데레사 할머니가 버스를 타자마자 내 손을 잡으시며 "신부님, 비행기가 뭐 버스와 똑같네요" 하셔서 한 바탕 웃기도 하며 제주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는 너무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못하는 대신에 효도를 할 수 있어서 진정 행복했다. 이렇게 자식노릇으로 보람있는 사목활동을 하던 96년 여름에 86세 되신 루시아 할머니가 내 손을 잡으시더니 "신부님! 내가 죽기 전에 우리 성당 좀 새로 지어주세요" 하시는 것이었다. 1931년에 본당으로 설립되어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등장하는 ’대화장’과 함께 70여 년의 긴 역사를 간직한 성당이지만 성전건물이 낡은 공소건물이었기 때문이다. 본당에서 공소로 다시 본당으로 승격될 정도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대화성당은 마을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만큼 초라한 모습이었다. 사제관이 없어서 전임 신부는 성당 밖 전셋집에서 살았으며 겨울이면 성작이 입에 달라붙을 정도로 추웠다. 나는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당을 비워두고 성당 밖에 있는 전셋집 사제관으로 가는 것이 예수님을 버려두는 것 같아서 성당 뒤의 창고방을 고쳐서 이사를 했다. 성당건물과 사제관이 초라하면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신부라도 좀 잘 생겼으면 나을텐데 나는 자타가 공인하는 ’부시맨’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키가 작고 시골스럽게 생겼다. 이렇게 삼위일체가 어울려서 못생기니 성당에 대한 지역의 인식이 좋지 않았고 전교가 안되는 것은 물론이고 본당의 엄마들도 아이들에게 "얘 너는 신부되지 말아라. 저렇게 고생하려면 장가가는 것이 낫다" 하니 내 자신이 더 비참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수녀는 물론, 사무장, 식복사를 둘 형편이 못되니 더욱 초라하게 보였던 것 이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희망을 가슴에 품고 살았는데 그것은 1 년만 있다가 유학을 가기로 이미 주교님과 구두 약속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루시아 할머니와 신자들의 마음을 알고 나서는 두 가지 갈등으로 평화롭게 지낼 수가 없었다. 유학을 포기하자니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을 것 같고 신자들의 마음을 저버리자니 양떼를 버린 목자가 될 것이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이상을 성체 앞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주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를 따라서 유학을 포기하고 성전을 짓기로 결심했다. 신부가 된 이상 신자들의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부임한 다음해 97년 4월에 낡은 건물을 무조건 헐었다. 그러자 십 년전부터 새성전을 짓겠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다가 좌절의 아품을 경험한 신자들은 나를 믿지 않는 눈치였다. 대부분 노일들인 200여 명의 신자들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마음의 고향이자 안식처인 성전을 지어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무작정 일을 벌리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딱 맞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하느님은 나의 무모한 용기를 도구로 삼으신 것 같다. 왜냐하면 97년 12월 3일에 IMF라는 무서운 환란이 닥쳤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아홉 군데의 도시 성당을 다니면서 구걸강론을 해서 성전건축기금을 다 마련해 놓은 상태였으니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만일 그 때 무작정 시작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이 성당은 없었을 것이다. 가까운 곳의 친구 스님이 98년 3월에 절을 짓기 시작했는데 아직도 빚을 못 갚아서 울상인 것을 보면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를 느끼게 된다. 성전건축은 하느님의 일이었다는 것을 체험하면서 나는 깊은 신앙인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곧 하느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압니다"(로마 8,28)라는 말씀을 성전을 지으면서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예술가들과의 만남으로 나는 또 한 가지 크나큰 은총을 체험했다. 서울 종로성당으로 모금을 갔을 때 조각가 한진섭 요셉 선생이 내 강론을 듣고는 돌조각으로 제대를 봉헌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다가 당신의 작품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성당 안의 모든 성물, 즉 십자고상, 강론대, 감실, 십사처, 성수대, 지붕위 십자가 그리고 성모상 까지 일체를 봉헌하시게 되었다. 또 자신의 작품에 대한 배경을 고려해서 도예가 변승훈 베드로 선생을 초대하여 아마 세계적으로도 처음일 분청사기 도벽으로 성당 내부 네 벽이 꾸며지게 된 것이다. 처음 시도하는 것이니 만큼 자그만치 1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도예가는 고심하면서 자신의 대작을 완성하게 되었다. ’야훼 이레’이신 하느님은 또 한 사람의 예술가를 미리 준비시켜 놓으셨는데, 그분은 프랑스에서 10년간 그림공부를 하고 돌아온 화가 김남용 요한 선생이다. 두 선배가 해놓은 것을 보고자 구경왔던 화가는 텅비어 있는 유리창을 보고 유리화를 그리게 됨으로써 성당 내부는 세 예술가의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국내외에서 이름있는 중견 예술가들의 이 작품들은 값으로 따지면 성전건축비와 맞먹을 수 있는 성예술품이 이 시골성당에 꾸며지게 된 것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소외되고 낙후되어 세인에게 잊혀져 가던 산골짜기 성당이 ’성전에서 피어난 예술’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되었다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는다. 다만 슬픈 일은 루시아 할머니가 새성전 축성식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작년부터 하느님이 하신 기적의 역사를 보려고 전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올 여름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것 같다. 이렇게 손님들이 끊이지 않다 보니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효도를 예전처럼 잘 못해 드려서 죄송하다. 그래서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나기 전에 성전건축 때문에 소홀히 한 효도를 한 번 더 하고 싶다. 일본말을 잘 하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많으시니까 일본여행을 추진해 볼까? 그저 새성전을 짓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한 이 시골성당을 통해서 하느님은 다른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다. 산골짜기에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그토록 원하셨던 안식처일 뿐 아니라 공해와 오염에 찌든 도시에서 각박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성전건축 과정에서 나는 한 때 사제직에 대한 위기를 느낄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도 겪었지만 요즈음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 이 성당에 살면서 이 모든 것이 ’행복한 나의 십자가’였다는 것을 안다.
@@@ 이 글은 성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발행되는 월간 [들숨날숨] 7월호(통권 15호) ’사목체험’에 기고한 글입니다. 잡지의 판권을 고려해서 간직하고 있다고 7월호가 발행된 것을 받아보고 글을 게재합니다. 혹시 잡지사에서 삭제하라고 하면 기꺼이 삭제하겠습니다. 저희 본당 홈페이지 주소는 www.artchurch.or.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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