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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오는 날 아침 등교길에 ....
작성자황인찬 쪽지 캡슐 작성일2000-07-07 조회수1,892 추천수10 반대(0) 신고

이야기이기비오는 날 아침 등교길에 ...

 

깊은 물과 얕은 물은 그 흐름이 다르다. 바닥이 얕은 개울물은 소리내어 흐르지만, 깊고 넓은 바다의 물은 소리 없이 흐르는 법이다. 모자라는 것은 소리를 내지만 가득 찬 것은 소리를 내는 법 없이 아주 조용하다. 어리석은 자는 반쯤 물을 채운 항아리 같고, 지혜로운 이는 물이 가득 찬 연못과 같다.                                                 (숫타니파타)

 

무더위를 식혀주는 시원한 빗줄기가 아침부터 내리고 있다. 덥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의 원망을 하느님이 들어주셨는가 보다. 비를 맞는 성당 마당의 잔디가 더욱 생기를 되찾는 것 같다. 우산을 쓰고 물 빠짐이 잘 되는지 성당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어릴 때 생각이 문득 나서 속으로 미소를 지어본다.

전형적인 농촌에서 태어나서 성장할 때 보릿고개가 있었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먹을 것도 없는데 비가 온다고 번듯한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간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게다가 3남 3녀나 되는 많은 형제들이 있었으니 집에 한 두 개밖에 없는 지우산(종이에 기름을 먹인 우산)이나 비닐 우산을 쓰고 학교에 간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이 어려웠다. 혹시 장날 그런 우산을 여러 개 사오셨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뒤집히거나 찢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못자리를 하다나 남은 비닐을 잘라서 우비를 만들어 뒤집어쓰고 허리에는 t새끼줄을 감았다. 물론 책가방이 있을 리 만무였기 때문에 보자기로 책과 도시락을 옆으로 질끈 동여맸다. 십여 리를 걸어가자면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에 국민학교가 있었으니 최대한 편리한 차림을 하고 다녔던 모습이 비오는 아침에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아름다운 추억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어느 비오는 날 아침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은 이상하게 형님이 우산이 없다고 불평을 하더니 비닐로 만든 우비도 입지 않고 비를 맞으며 그냥 집을 나섰다. 아마도 국민학교 3-4학년은 되었을 때니까 예쁜 여학생 보기가 창피했던 모양인가 보다. 형님이 서서히 이성(異性)에 눈을 뜬 시기였으리라. 요즘 부모들 같으면 비를 맞고 학교에 가는 아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어 자가용으로 아니면 택시라도 태워주었을 텐데 .... 힘들게 농사를 지어서 많은 자식들을 키우시느라 정신 없으셨던 아버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형님을 쫓아가 붙잡아서 집 앞에 있는 논바닥에 던져 버리셨다. 물이 가득 고여서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을 것을 예상하셨으리라. 덕분에(?) 형님은 그 날 학교를 빠지는 행운을 얻었지만 무서운 아버지의 모습에 혼이 났다. 물론 나도 아버지로부터 무섭게 가정교육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혈기 왕성하셨던 아버지가 이제는 70이 넘은 노인이 되셔서 고향에서 형님 내외와 함께 사시고 계시다.

비가 오는 오늘 아침에 아버지와 형님은 이런 추억을 생각이나 하셨을까 궁금하다. 어린 시절의 웃지 못할 사건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작은 미소로 떠오를 수 있는 것은 지나간 옛날 이야기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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