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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자유와 억압(연중 제14주일)
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0-07-09 조회수2,351 추천수8 반대(0) 신고

2000, 7, 9  연중 제14주일 복음 묵상

 

 

마르코 6,1-6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그 무렵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자 많은 사람이 그 말씀을 듣고 놀라며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하면서 좀처럼 예수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디서나 존경을 받는 예언자라도 자기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거기서 병자 몇 사람에게만 손을 얹어 고쳐 주셨을 뿐, 다른 기적은 행하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믿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이상하게 여기셨다.

 

 

<묵상>

 

모든 사람은 자유를 원합니다. 자유로울 때에만 참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다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유란 단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그 사람의 의지만으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 안에서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자유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서로의 삶을 존중할 때 비로소 자유는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왜 모든 사람은 자유를 원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의 자유를 위해 다른 이들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에 다른 사람들을 얽어매려 하기 때문입니다.

 

혈연, 지연, 학연, 직장연 등이 바로 이러한 얽어맴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얽어맴이 자유를 억압하는 양태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기대와 의존'이고, 다른 하나는 '무시와 질투'입니다.

 

"좋은 데 있을 때, 잘 좀 봐 줘라." "우리가 남인가? 우리 사이가 어떻게 맺어진 사이냐? 서로 도와야지." 바로 '기대와 의존'입니다. 기대와 의존은 상대방을 낡은 관계와 고정된 틀 속에 붙잡아두려는 시도입니다. 기대와 의존은 보다 폭넓은 관계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합니다. 기대와 의존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은 이를 거절하는 몰인정한 사람으로 몰아붙이기 쉽습니다.

 

"저 놈 주제에 무엇을 할 수 있어?" "출신이 그러니 어쩔 수 없지." "저 놈이 왠일이지? 어쩌다 한 번이겠지." 바로 무시와 질투입니다. 무시와 질투는 한 사람의 무한한 가능성을 철저하게 짓밟습니다. 무시와 질투에 젖어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을 잘 알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그 사람을 자기 멋대로 평가하고 힘차게 날고자 퍼덕이는 그 사람의 자유의 날개를 무참히 꺾어버리기 쉽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억압하는 이 두 가지 모습 사이에서 힘겹게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 속에 사셨기에, 우리가 느끼는 힘겨움을 똑같이 겪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들만의 안락한 공동체를 꿈꿨던 제자들에게서, 당신이 행하신 기적을 보고 따르던 군중에게서, '기대와 의존'이라는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를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굴레를 벗어나 당신의 길, 즉 치욕적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저 사람이 어떤 지혜를 받았기에 저런 기적들을 행하는 것일까? 그런 모든 것이 어디서 생겨났을까? 저 사람은 그 목수가 아닌가? 그 어머니는 마리아요,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다 우리와 같이 여기 살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라는 자유를 억압하는 굴레를 몸으로 받아 안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결코 좌절하시거나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으시고 당신의 길, 즉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억눌린 이들을 해방시키는 부활의 길을 걸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굴레를 벗어버린 참 자유인이셨습니다. 참 자유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신앙인들도 참 자유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자유를 억압하는 두 가지 양태 '기대와 의존', '시기와 질투' 사이에서, 때로는 가해자로 때로는 피해자로 살아갑니다. 가해자가 되었든 피해자가 되었든 모두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처지가 되어 고통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참 자유인이 되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따라 우리는 참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억압의 굴레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 억압의 굴레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편안하고 익숙한 것이기에, 이것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포기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용기가 필요합니다. 고통스러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우리의 능력만으로는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참 자유인이셨던 예수님의 삶과 죽음, 십자가와 부활을 봅니다. 용기를 얻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길을 함께 걸어갈 힘을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안주하고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몸부림쳐 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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