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잃어버린 세월(연중 16주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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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황인찬 | 작성일2000-07-25 | 조회수2,687 | 추천수17 | 반대(0) 신고 |
잃어버린 세월
그는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빗고 넥타이를 맸다.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다.
호텔 커피숍에 가자, 비서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비서로부터 메모지를 건네 받았다. 10시 회의, 12시 위원들과 오찬, 3시 모교 방문 장학금 전달식, 6시 동창회 임원들과의 만찬.
그는 10시 회의에 참석하여 조금 졸았다. 12시 위원들과의 오찬은 양식을 먹었다. 고향에 있는 모교를 향해서 1시에 출발했다.
그런데 아뿔싸. 대형사고가 생겨서 길이 막혀 버린 게 아닌가. 그는 미칠 지경이었다. 이번 일로 표를 좀 다져 놓을 생각인데 ... 그는 우선 카폰으로 전화를 걸어 행시 시간을 좀 늦춰 달라는 부탁을 했다.
목이 말랐으나 준비된 음료가 없었다. 근처에 가게도 없었다. 그는 차에서 내려 ’약수터’라는 팻말이 있는 오솔길로 들어갔다.
한참 걸어 들어가자 숲속의 빈터에 옹달샘이 있었다. 한데 떠먹을 그릇이 없었다. 체면 불구하고 어렸을 적에 했던 대로 엎드려서 입으로 직접 물을 먹어야 했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내고 엎드려서 맛있게 물을 먹었다.
갈증이 가신 그는 무심히 옹달샘 속을 들여다보았다. 푸른 하늘과 흰구름이 들어 있고, 소나무 그림자가 들어 있고 ... 그들은 예전 모습 그대로이나 자기의 얼굴만이 영 딴판으로 달라져 있지 않은가.
한참을 생각에 참겨 있던 그는 갑자가 와이셔츠를 벗었다. 구두를 벗었다. 양말을 벗었다. 맨발로 잔디 위를 걸어 다니다가 벌렁 누웠다. 아아, 푸른 잔디 위에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본 지 몇 해 만인가.
그는 장학금 전달식장에서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잃어버린 저를 찾았습니다. 그때는 체면에 살지도 않았고 인기를 쫓아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동심에 살고, 진실을 따르며 살겠습니다."
정채봉 시인의 글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을 이 시는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항상 꽉 찬 시간표에 따라서 일에 채이고 사람을 끊임없이 만나야 뒤떨어지지 않을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의 주인공은 뜻하지 않게 갈증을 채우려고 갔던 작은 옹달샘에서 잃어버렸던 지난 삶을, 지난 세월을 깨닫게 된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불쌍한 사람들이다. 우선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버렸다. 인간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잃어버렸으니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공허한 마음을 채울 수가 없는 것이다. 물질을 마음껏 소유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명예만 얻으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권력을 쥐고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더욱 아니었다. 결국 남는 것은 허무함과 공허함뿐이었다.
이제 우리가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아야 한다. 우선 하느님을 우리 삶의 중심이요 으뜸으로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주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기도 하다. 인간만이 행복하겠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 대자연과 더불어서 살아가겠다는 상생(相生)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아가야 한다.
바쁜 일상생활을 피해서 잠시 휴가를 즐기는 여름에 예수님이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자는 말씀은 잃어버린 세월을 되찾으라는 가르침이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았던 지난 세월이라면 이번 휴가를 통해서 우리 인간의 근본을 회복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잃어버린 세월을 찾을 때 마지막에는 잃어버렸던 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야 우리는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 되고 잃어버렸던 자아를 찾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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