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뒤섞이지 않는 힘과 용기(연중 22주 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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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9-04 | 조회수2,591 | 추천수21 | 반대(0) 신고 |
2000, 9, 4 연중제22주간 월요일 복음 묵상
루가 4,16-30 (예언자는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
예수께서 자기가 자라난 나자렛에 가셔서 안식일이 되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오,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서 시중들던 사람에게 되돌여 주고 자리에 앉으시자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의 눈이 모두 예수에게 쏠렸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 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잘 들어라. 엘리야 시대에 삼년 반 동안이나 하늘이 닫혀 비가 내리지 않고 온 나라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이스라엘에는 과부가 많았지만 하느님께서는 엘리야를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보내시지 않고 다만 시돈 지방 사렙다 마을에 사는 어떤 과부에게만 보내 주셨다. 또 예언자 엘리사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많은 나병 환자가 살고 있었지만 그들은 한 사람도 고쳐 주시지 않고 시리아 사람인 나아만만을 깨끗하게 고쳐 주셨다."
회당에 모였던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는 모두 화가 나서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냈다. 그 동네는 산 위에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밀어 떨어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길을 가셨다.
<묵상>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이 벼랑 끝에서 맞섭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적대자가 되어 예수님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합니다. 절대절명의 위기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올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복음 속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들의 한가운데를... 한가운데를...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자기의 갈 길을...
예수님의 발걸음에 함께 해 봅니다. 예수님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적대자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그저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차하게 도망치려 했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붙잡아 기어이 벼랑에서 떨어뜨렸을텐데... 자신들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차마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내리신 성령의 권능입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와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섞일 수 없는, 섞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마구 뒤엉켜버리는 경우를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례로 현재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동물들에게 땅이나 자연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은 없다. 매매나 양도 등의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본래 내 땅이라든가 내 소유의 강물, 내 소유의 산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만이 갖는 관념일 뿐이다. 인간이 소유의식을 갖기 시작했고 동시에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소유의식의 확대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대립과 분쟁, 투쟁과 패배의식을 갖게 한 원인이었다. 과거부터 전쟁의 원인은 영토 확보와 관련되었다. 폭력의 원인도 또한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위한 투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상품의 생산은 모두 자연물의 가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부도덕한 매매형태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투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산업주의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 헌미헌금부 발행 '9월 헌미헌금 봉헌의 달 자료' 중 강론 참고자료에서 인용)
마치 자본주의 자체를 공기와 같이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입니다. 극복해야 할 현실에 오히려 적당히 타협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할 신앙인을 다시금 일깨우는 비판입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타협하지 않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비타협적인 삶이 십자가의 죽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지만, 바로 이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이 있고, 지금의 교회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분명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정의를 위한 몸부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함... 절대로 포기할 수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들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적대자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당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신 예수님께 청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의 사제로서 함께 길을 걷는 동기 신부들과의 값진 휴식을 떠나기 앞서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가 띄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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