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연중 24주 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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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09-20 | 조회수2,765 | 추천수14 | 반대(0) 신고 |
2000, 9, 20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루가 7,31-35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증언)
그 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도대체 무엇과 같을까? 마치 장터에서 편갈라 앉아 서로 소리지르며, '우리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았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는 아이들과도 같다.
너희는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으니까 '저 사람은 미쳤다.' 하더니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까 '보아라, 저 사람은 즐겨 먹고 마시며 세리나 죄인들하고만 어울리는구나!' 하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가 옳다는 것은 지혜를 받아들인 모든 사람에게서 드러난다."
<묵상>
하느님께서는 계속되는 당신 창조 역사의 동역자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이 초대에 응답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삶이 결코 우리의 수동적인 모습만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가끔씩 느껴지는 하느님의 침묵은 우리의 이러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참여가 사리 사욕을 채우기 위한 주관적이고 배타적인 참여를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참여를 위해서는 주님의 역사하심과 이끄심에 대한 굳은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에 우리를 맞추는 것이지 우리의 뜻에 주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 대한 이스라엘 권력자들의 태도는 주님이 배제된 주관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관주의에 빠져 있으니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자기 방식대로 거꾸로 받아들이고 비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은 결코 맹목적인 금욕주의나 그 반대의 향락주의를 부추기거나 원하시지 않습니다. 고요한 침묵 속에 주님과 대화할 때가 있으면 이웃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서 사랑을 나누고 주님께 찬미를 드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를 판단하는 기준은 주님과의 친밀한 만남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주님의 뜻과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결코 자신의 편의에 따라 이러한 판단이 이루어져서는 안됩니다.
함께 춤을 춰야 할 때 곡을 하고, 슬픔을 나누어야 할 때 실없이 웃어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자신의 울타리를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들이는 첫걸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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