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수님을 따르려면(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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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10-04 | 조회수2,524 | 추천수13 | 반대(0) 신고 |
2000, 10,4 성 프란치스코 기념일 복음 묵상
루가 9,57-62 (예수를 따르려면)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가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예수께 "저는 선생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이 머리 둘 곳조차 없다." 하고 말씀하셨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선생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겨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여라." 하셨다.
또 한 사람은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집에 가서 식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묵상>
오늘 복음에는 소명과 추종에 관한 짧은 이야기 세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추종자와의 초기 관계 설정에 대해서 보면, 첫째, 셋째 이야기와 둘째 이야기가 구별될 수 있습니다. 첫째, 셋째의 경우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먼저 다가가지만, 둘째의 경우는 예수님께서 추종자를 부르십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상황에서 공히 철저한 추종을 명하십니다.
'부르심과 응답'(물론 전적인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습니다.)의 과정이 겉모습으로는 자기가 먼저 예수님께 다가간 것처럼 보일 경우에도 이미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다면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하고 예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고 따라야 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조차 없다."(58절)라는 말씀에서 어찌보면 서글프게까지 느껴지는 예수님의 상황에 온전히 함께 해야만 합니다. 편안한 보금자리는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며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어디라도 가야만 합니다.
좀 더 파격적인 말씀이 둘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장례까지도 포기하면서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당신 유대인 사회는 장례를 무척 중요시했기에 그 엄격했던 율법 준수도 면제되었고, 시신을 만지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기에 조문고 가지 않던 제사장들도 자신의 부모, 친척의 장례에는 참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에서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계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무리한 것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소식을 전하는 것"(60절)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기"(62절)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맹목적인 추종이 아닙니다. 오직 하느님 나라를 위한 철저한 투신을 원하실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지고, 포로들은 해방되고, 소경들은 다시 보며, 억눌린 이들은 압제에서 해방되는(루가 4,18-19) 곳이며 때입니다. 현실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지만, 현실을 극복함으로써 완성될 나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함께 한다면 예수님께서 이처럼 인간적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를 추종자들에게 명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현실로 주어진 삶에 안주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를 과감히 선포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현실의 벽이 너무나도 두텁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 부르심 받은 사람들,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온전한 투신이 요구되는 것이며 세상과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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