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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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도행을생각하는모임 | 작성일2000-11-14 | 조회수2,640 | 추천수11 | 반대(0) 신고 |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김명진 (수녀, 마리아의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분단 55년 역사상 가장 큰 기쁨이었던 남북정상회담 앞에서 기쁨이라는 단어는 표현력이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양한지라 모두가 우리의 기쁨을 축하해 주지는 않았습니다. 주변국들의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 답답함을 느껴야 했고, 소위 자주국가라고는 하지만 보여지는 현실은 실타래 얽히듯 얽혀있기에 복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게 했습니다. 더군다나 극우세력들과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들의 무식한 발언과 경솔한 모습은 실망을 넘어서서 분노케 했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는 참으로 소인배다운 모습임을 어찌 숨길 수 있겠는지요. 지금도 마치 국민과 나라를 생각하는 듯 얘기하는 걸 들으면 묻고 싶어집니다. "당신이 지금 무얼 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으십니까?" 하고…
그리고 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치과모녀 살해 사건’의 용의자로 세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며 잊혀질 듯 계속되는 유죄·무죄 앞에 서 있는 이도행씨 사건과 이번 남북정상회담이 같은 맥락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심한 비유가 아닐까 하는 사람들도 있을 줄 압니다.
당신들의 권한, 누구에게서
제가 이도행씨 재판에 다닌 지는 3년이 되었습니다, 대법원의 파기소송으로 고법으로 넘어오게 된 시기부터이지요. 그전까지는 저도 언론과 재판에 다녔던 자매들이 나눠준 소식을 듣는 게 전부였습니다.
그 당시 저는 금호동에서 도시빈민사목을 하는 공동체에 있었습니다. 그곳은 철거민들이 투쟁을 통하여 얻은 공공임대주택에 들어가기까지 임시로 살고 있는 가이주단지 입니다. 저희 수녀원도 9평 짜리 가건물에서 그분들과 똑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저는 그곳 주민들이 공동 설립한 작업장에서 일했습니다. 작업장은 쉽게 말하면 생활한복을 하청 받아 만드는 곳입니다. 저는 그 공장의 시다로 근무했지요. 그곳의 삶은 여러 면에서 가슴이 많이 아픕니다. 물질적인 가난으로 인해 인권이 무시되기가 다반사이고, 기득권자들의 권력남용에 가슴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교회의 무관심에 또 한번 소외되고…. 그래서 저도 인권에 대해 어느 때보다도 관심이 높았던 시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집회나 모임의 참석은 무뎌졌던 제 마음을 다듬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이도행씨를 알게 된 것이지요. 사실 처음 재판을 다녀와서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도대체 권력과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물론 신앙인 더구나 수도자로서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아는데, 그 아는 것과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는 걸 계속 체험하게 되니까 머리 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재판을 지켜보면서 놀라웠던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와 꼭 사형을 시켜야 직성을 풀린다는 듯한 검사의 논고를 들으면서 도대체 저들에게 있어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귀중함 그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하고 회의가 들었습니다.
믿고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고 다들 얘기하지만 어디서 무엇을 보고 믿을 것인가 싶어졌습니다. 물론 그쪽에서도 나름대로의 사연이 있고 억울함이 있겠지만 계속되는 재판을 지켜보는 저로서는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법률 상식이 많지 않은 제가 들어도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고 빈약한 논고는 권위에 대해 애처로움을 갖게 하였습니다. 저렇게 하고 있는 자신은 얼마나 비참할까 싶고, 인간이 자신의 약함과 잘못을 인정한다는 게 은총 없이는 어렵다는 걸 보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사람의 생명을 걸고 하는 재판인데 제3자인 저로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명예나 권위에 집착함은 직무유기이고, 그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재판을 다니면서 바로 이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인 그 어떤 것에 집착하고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권위는 과연 어디에서 오는지….
하느님의 사랑 선언
이도행씨 재판을 다니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많이 보게 됩니다. 비록 이도행씨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런 나날이었겠지만, 이것을 통해 하느님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내고 계심을 확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느님의 방법으로….
이 시대 안에서 하느님은 점점 더 작아지고 계시기에, 우리가 더욱 알아 뵙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의 어린 양으로 알려 주셨듯이, 그분은 인간들이 바라는 권능보다는 어린양처럼 무기력하고 무능한 모습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와 눈 높이에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지요. 예수님은 인간들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권력을 주시지 못합니다. 그분은 단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체험한 가장 큰 것 즉 ’죄에서의 해방’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죄에서의 해방! 죄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고, 하느님께 가는 것을 막습니다. 그렇기에 이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시고자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자신을 바치십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우리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있기에, 무능력한 예수님께 엉뚱한 것을 청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 생활 안에서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도행씨를 위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저의 확신을 다시금 견고케 할 수 있었습니다. ’이도행을 생각하는 모임’이 발족되는 걸 보면서 감격스러웠습니다. 어떤 힘이 생긴 것도 아니고, 상황이 진전된 것도 아니지만 그곳에는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발족 모임 때 탤런트 권해효씨의 말이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제가 여기에 오게 된 이유는 제 아이에게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어서입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이도행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걸 알아듣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에 희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똑 같은 현실일지라도….
우리가 바라는 것은 결코 큰 것도 아니고 욕심도 아닙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대접받고, 그 사람을 신뢰해 주어 생명(生命)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믿음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요? 이 믿음은 절망이나 고통에도 불구하고 일어서게 하는 영양제입니다. 생명수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임을 저는 믿습니다. 서로 믿고 격려하고 사는 것!
가난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가난 이제는 저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제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싶었고, 행여 누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떠올리면서 용기를 내게 된 것입니다.
가난하신 그리스도! 이것이 저의 화두(話頭)입니다. 제 삶의 목표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보이기 때문에 만족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가난을 실천한다는 것이 쉽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가난하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가난이 무엇이 다르냐고 묻고 싶을 실지 모르겠네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난은 주로 그분 삶의 외형적인 모습이라고 봅니다. 33년이란 짧지 않은 삶을 예수 그리스도는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이 가난은 선택이었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이 가난을 따르고자 노력합니다. 수도자인 제가 가난서원을 하게 되는 이유도 바로 그렇게 사셨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함이지요.
그러나 가난하신 그리스도는 제가 묵상하기엔 존재(存在)에 그 초점을 두고 있다고 봅니다. 더 쉽게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고 할까요. 예수님의 하느님께 대한 순명은 바로 가난하셨던 마음에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이 무엇일까요? 저는 ’자신의 것을 바라지 않는 마음’이라고 봅니다. 위에서 말했듯이 자신의 무능력함을 받아들이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 그렇기에 예수님을 두고 요한 복음사가는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표현했다고 저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내어놓는 마음이 바로 가난한 마음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가 이러 저러한 모임에 계속 다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른 수녀님들이 이런 저를 보고 대단하다고 하는데, 사실 알고 보면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제게 주어지는 것들에 대한 저의 식별기준은 단 하나입니다. "가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순간에 어떻게 하실까?"입니다. 아주 간단하지요.
그런데 저는 가진 게 너무 없는 한 사람이요, 수도자입니다. 그저 제가 내어놓을 수 있는 것은 자유의지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時間)이기에, 그 시간을 그분들을 생각하며,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드리는 것이 ’함께 함’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그렇지만 함께 하면서 늘 저는 더 많은 걸 얻게 되고, 배우게 되고, 받게 됨을 알게 되기에 항상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가난하신 그리스도가 곳곳에 얼마나 많은지….
저는 교회단체 뿐 아니라 다른 곳에도 함께 할 수 있는 곳은 참석하려고 노력합니다. 하느님은 교회밖에도 계시기 때문이지요!
일주일에 한 번씩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 봉사를 갑니다. 말이 봉사이지 허드레 일을 도와 드리지요. 그런데 그곳에 다녀오면 마음이 얼마나 부유해지는지 모릅니다. 다들 신자들이 아니시지만. 참으로 ’공동의 선’을 위해 열심히 자신을 내어놓고 계시기에 그 힘을 받아오나 봅니다. 또한 건전한 도전도 많이 받게 되어 제 삶을 깨어있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아무튼 제 삶의 목표는 가난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기에,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고저 노력할 것입니다. 이런 저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넓히고자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가지고….
제가 좋아하고 늘 묵상하는 <미가서> 6장 8절로 부족한 이 글을 마무리짓고자 합니다.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공동선의 단상에 실렸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었습니다.) 이도행(세바스티아노)을 생각하는 모임 http://org.catholic.or.kr/ch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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