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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작성자상지종 쪽지 캡슐 작성일2000-12-01 조회수2,100 추천수14 반대(0) 신고

지난 주에 있었던 고3피정 참회예절 때 썼던 묵상문입니다.

이제 전례력으로 한 해를 마감하고 주님께서 주실 희망의 한 해를 맞이하면서, 믿음의 벗들께서 지난 삶을 돌아보는데 자그마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올립니다.

고3 학생들에게 맞춘 묵상문이기에 벗님들의 상황과 잘 맞지 않을수도 있지만 한 번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이 묵상문을 읽으시기 전에 루가 복음 15, 11-32 (잃었던 아들) 을 먼저 읽고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돌아보면 바쁘게 지난 시간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채 돌아 볼 여유 없이

힘차게 앞만 보고 달려온 시간이었습니다

 

그래도 행복했습니다

달릴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도착하고자 하는 목적지가 있다는 것이

 

그러나

이제 막 도착했다고 여겨지는 이 시점에서

지나 온 시간

지난 온 발자국을 돌아다보니

무엇을 향해 달려왔는지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나에 도달하면

또 다른 하나가 기다리고

그곳에 도달하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까요

 

끊임없이 앞만 보고 달려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차라리 여기서 주저앉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나를 내리누르는

이름 모를 압박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인생이란면

차라리 여기서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시간이 멈추기를 기도하고 싶습니다

 

기쁨과 희망이 넘쳐나기에

있는 힘을 다하여 달려가고픈 그런 곳은 어디일까요

달려가서 그 안에 푹 안겨 편안한 쉼을 얻을 곳은 어디일까요

그 안에 있음만으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아무리 사람을 점수로 평가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나 하나 만큼은 점수로부터 해방되고픈 것은 욕심인가요

번듯한 일자리, 풍족한 재산, 남부럽지 않는 지위가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나만은 이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자 한다면 욕심인가요

 

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신만만한 젊은이였습니다

무엇인가를 향해 뛰쳐나가고픈 욕구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이 아들, 이 젊은이, 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뜻을 이루고자

버려서는 안 될 것을 버리고 자신의 길을 나섰습니다

벗어나서는 안 될 어버지의 품을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려갔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하러 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았던

이 아들, 이 젊은이, 이 사람은 그냥 달려갈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힘차게 달려온 결과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향해 달려온 목적지도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달릴 이유도 없어졌습니다

더 이상 달릴 힘도 이제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남아 있는 것 하나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기에는 아버지가 너무 멀리 계셨습니다

아니 너무 멀리 계시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너무나도 멀리까지 생각 없이 달려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주 가까이 아니 항상 함께 계셨습니다

아들은 자신이 달리는 동안 아버지를 보지 않았을 따름입니다

자신도 살필 겨를 없이 앞으로만 달려온 아들이

아버지를 볼 수 없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아들은 자신을 본 순간

자신과 함께 계신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본 순간

있는 그 자리에 주저앉을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기에 아버지께로 달려갔습니다

아니 이제 자신의 자리는

아무 의미가 없는 공헌한 자리가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가꾸어야 할 소중한 삶의 자리로 다시 탈바꿈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지난 한 해

아니 학생이라는 신분을 가지게 된 지난 십 여 년

지금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고등학교 졸업장, 수능 점소, 내가 다니게 될 대학교, 직장,

아니면 다른 무엇

 

참으로 소중한 것을 잊고 살아온 시간인지 모릅니다

나를

나를 낳아주신 부모님을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 자매 친구들을

나와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이들을 이어주고 생명을 주신 하느님을

잊고 살아온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잊고 살도록 강요당한 시간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제 잊어버린 시간,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 찾아야 할 때입니다

다른 누가 아니라 바로 내가 이 시간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이 시간을 마련하신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픈 형제 자매 친구들이

나를 사랑하시는 부모님께서

그리고 내 자신이

바로 이러한 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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