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상과 현실(대림 3주 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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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0-12-23 | 조회수1,858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00, 12, 23 대림 제3주간 토요일 복음 묵상
루가 1,57-66 (세례자 요한의 출생)
엘리사벳은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께서 엘리사벳에게 놀라운 자비를 베푸셨다는 소식을 듣고 엘리사벳과 함께 기뻐하였다.
아이가 태어난 지 여드레가 되던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가리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가 나서서 "안 됩니다. 이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해야 합니다." 하였다.
사람들은 "당신 집안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며 아기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가리야는 작은 서판을 달라 하여 "아기 이름은 요한" 이라고 썼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바로 그 순간에 즈가리야는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하게 되어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모든 이웃 사람들은 무서운 생각마저 들었다. 이 일은 유다 산골에 두루 퍼져 이야깃거리가 되었고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마음에 새기고 "이 아기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까?" 하고 말하였다. 주님의 손길이 그 아기를 보살피고 계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묵상>
그리스도인들은 두 가지 전혀 차원이 다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라는 현실과 구체적인 삶의 현장이라는 현실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이상' 쯤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이상으로 여겨지는 하느님 나라와 복음은 현실의 위력 앞에서 뒤로 밀려나기 십상입니다. 이러다 보면 신앙은 하나의 고상한 악세서리로 변하고 맙니다. 신상명세서의 종교란을 채우기 위해 종교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종교가 하나의 기호품 정도로 전락하고 맙니다. 여기에서 신자들의 숫자는 늘어나지만 세상은 오히려 비복음적으로 전개되는 기막힌 상황이 벌어집니다.
무엇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현실인지, 현실이어야 하는지 묻게 됩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전혀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무시해서도 안됩니다. 다만 이것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하느님 나라와 복음을 고상한 이상으로 넘겨버리는 그릇된 현실 인식만은 철저히 경계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가리야와 어머니 엘리사벳이 감지하고 있는 현실과 다른 이웃과 친척들이 감지하고 있는 현실은 달랐습니다.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짓느냐 즈가리야라고 짓느냐라는 문제는 과연 무엇을 절박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는냐라는 문제와 다름 없습니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과거의 인간적인 전통을 현실로 받아들일 것인가라는 중대한 결단이 요구됩니다. 이 선택의 기로에서 즈가리야와 엘리사벳은 모든 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자신의 현실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아기 이름의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말입니다. 이들이 선택한 현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도 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번져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참된 현실은 하느님 나라와 복음이어야 합니다. 이 현실을 또다른 현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안에서 실현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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