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내가 청하는 것(사순 2주 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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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지종 | 작성일2001-03-15 | 조회수2,420 | 추천수19 | 반대(0) 신고 |
2001, 3, 14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마태오 20,17-28(수난에 대한 세 번째 예고, 섬기는 자가 다스린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불러 조용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대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손에 넘어가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가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며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 때에 제배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왔는데 그 어머니는 무엇인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예수께서 그 부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 부인은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부탁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 형제들에게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나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마실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도 내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내 왼편 자리에 앉는 특권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을 사람들은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셨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가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놓고 말씀하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묵상>
평소 본당 사목보다는 특수(?) 사목에 대한 관심을 많이 보여온 터라 가끔씩 제게 "신부님! 정말 특수 사목 분야로 나가실 거예요?"라는 질문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본당 사목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소외된 삶의 현장이 주변에 너무나도 많고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학생 시절부터 본당에서 사목을 하고 있는 지금까지 특수 사목(특별히 노동 사목이나 빈민 사목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도 본당 사무장님께서 우여한 기회에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물론 "예"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 한 구석에서는 참 관념적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똑같은 질문에 항상 "예"라고 대답하는 것이 타성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모처럼 부제 때에 쓴 묵상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부제 때, 그러니까 재작년 사순 제2주간 수요일에 어떤 묵상을 했을까 하며 묵상 공책을 열어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이 너무나도 익숙한 내용이기에 "오늘 말씀은 참된 겸손의 삶에 대한 거지 뭐."라고 넘어가려는 마음이 있었기에, 예전에는 어떤 묵상을 했었나 한번 돌아보고 제 안에 신선한 충격이라도 불어넣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일겁니다.
그 때의 묵상이 비록 부족한 것이었지만, 자그마한 자극으로 다가옵니다. 가끔씩 예전의 묵상글을 읽어보는 것이 타성과 관성에 젖은 제 생활을 일깨우는데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예전의 묵상글을 올립니다. 부제 때의 마음으로 돌아가 순수와 열정을 다시 품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1999, 3, 3 사순 제2주간 수요일 복음 묵상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기를 청한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를 청하는 것이다. 기도가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더 많은 십자가를 지고 가겠다는 청원을 드리는 것이다. 기도는 간절하지만 정작 십자가를 지고가려는 삶의 자세는 턱없이 부족하다.
제의를 맞추기 위해 삼양동 봉제협동조합 옷사랑과 솔샘 공동체를 찾았다. 그곳에서 만난 사복 수녀님들이 인상적이다. 편안한(?) 공동체에서 떨어져나와 주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수도 성소의 길을 가는 이들이 참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수도자가 허름한 집에서 노동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실 전혀 어색한 것도 아니고, 어쩌면 가장 낮은 자리를 택하여 땀을 흘리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모습인데, 우리 교회 안에서 성직자와 수도자는 언제부터인가 복음과 무관한 고상함으로 치장되었고 세속과는 다른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미명하에 참으로 가난한 이웃들의 삶과는 유리된 안락한 삶을 살아온 게 사실이다. 입으로만 외쳐대는 가난, 현란한 수식어로 독신 성소자의 삶을 치장하고 정당화했던 잘못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는 어떠한 수식어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가난과 비천한 삶을 살아가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다고 어떠한 설명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순수한 믿음은 참으로 가난을 가난으로 살게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과 너무도 멀리 있는 나를 본다. 머리에는 가난이 자리잡고 있지만 몸은 어느 재벌 남부럽지 않은 안락함과 부유함을 만끽하는 기형적인 나를 본다.
주님의 정상적인 사제가 되고 싶다. 참 사제가 되고 싶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십자가 외에는 모든 것을 버리도록 이끌어주소서."
참으로 기막힌 현실은 지금 제가 있는 곳이 미아3동 본당이라는 점입니다. 삼양동 봉제협동조합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에 있으면서, 제가 이곳에 부임한 지 1년 반 동안 지구 사제회의를 하기 위해 삼양동 선교본당에 간 것 외에는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었습니다. 많이 무뎌지고 무심해진 제 자신을 봅니다. 물론 제게는 지금의 본당 사목이 가장 소중한 사명이지만, 이것이 저의 무심함을 정당화할 수는 없을 겁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관념이 아니라 실천으로 제 한 구석에 밀려나 있던 소중한 십자가를 보듬어 안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주님 안에 사랑담아 여러분의 벗 상지종 베르나르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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