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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왜 겸손하지 못할까?
작성자오상선 쪽지 캡슐 작성일2001-03-24 조회수3,136 추천수13 반대(0) 신고

겸손은 완덕의 기초라고 한다.

모든 덕행의 기반에 겸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다.

그것도 보잘것없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서 말이다.

어디 그 뿐인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서 배워라 하시고,

실제로 빵의 형상으로 매일같이 제대 위에 내려오시고

우리 몸에 오시어

우리의 양식이, 밥이 되어주시기까지

겸손하시다.

성 프란치스코도 주님의 이러한 겸손에 뿅간 사람이었다.

아니, 이럴수가

어떻게 하느님이신 분이 이렇게까지 당신을 낯출수 있단 말인가?

겸손의 극치요 극치의 겸손이 아닌가?

이러한 충격은

프란치스코로 하여금

겸손과 가난의 길로 걷지 않을 수 없게 해 주었다.

 

나도 겸손한 자로 머물고 싶다.

그런데 그게 말만큼 싶지 않다.

왜일까?

왜 나는 겸손한자가 되지 못하는 걸까?

 

1)무엇보다도

겸손이야말로 진정한 덕을 이루는 길임을 깊이 깨달아야 하는데

그걸 체험적으로 깊이 못 깨닫고 있기 때문이리라.

 

2) 아마도 나는 종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주인이 되고 싶지 종이 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저 내면에서부터

자꾸만 용솟음치고 있기 때문이리라.

나는 원래 종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주님(주인님;Dominus)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모시고 있다면 나의 신분은 당연히 종일진대

종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3) 종이 되기보다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로부터도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짐짓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처럼

내 잘난 꼴을 보이고 싶어하고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이 마음이 없어져야 나는 겸손해 질 수가 있으리라.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고,

세리는 하느님의 보잘것없는 종이라는 마음이 그 중심에 있다.

바리사이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올바른 사람이 아니니,

그것은 자기 꼬라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세리는 대신 하느님으로부터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니,

자기의 신분과 정체성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종>이란 사실이다.

 

<나는 종이로소이다!>

하느님의 종이요, 모든 사람의 종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성 프란치스코가 추구한 자세요 목표였다.

훌륭한 신자가 되는 것,

영적으로 뛰어난 자가 되는 것,

모든 이로부터 추앙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종이 되는 것,

이것이 목표라니 우습지 않은가?

 

허나

이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길이다.

이것이 진정한 완덕의 길이다.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길이다.

아니,

이것이 진정 하느님이 되는 길이다!!!

 

<종>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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