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형제라는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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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1-05-18 | 조회수2,098 | 추천수15 | 반대(0) 신고 |
요즈음 굿뉴스 게시판을 보면 한번씩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들로 감정들이 격앙되어 서로 아귀다툼을 하는 모습을 종종보면서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이를 보면서 주님 안에서 한 <형제>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되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요즈음 사도행전의 독서는 초대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던 논쟁과 알력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고 이를 어떻게 슬기롭게 해결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다시한번 짚어보자.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이방인 공동체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사람들과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교회의 구성원이 이렇게 사상적 배경이 다른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음이 문제의 씨앗을 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현 교회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구교우 집안에서 전통적인 신앙생활을 해 온 신자들이 있는가 하면 신영세자 출신의 신자들도 있기에 사고방식에 있어 많은 차이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곳 교회의 문제의 핵심은 이방인에서 개종한 사람들도 유다인들처럼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다인들의 문제제기에서 비롯되었다. 말하자면 유다인들은 구교우들로서 자신들의 기존 사고방식이 고수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흥 영세자들인 이방인 출신 신자들은 우리가 유다인도 아닌데 왜 유대인 전통을 따라야 하느냐고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공동체 안에 극심한 알력과 불화를 가져왔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마저도 자체로 해결을 못할 정도였다.
공동체의 선택은 자체 해결이 안된다면 최고 권위에 문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해법을 찾는다. 이것이 소위 교회의 최초의 공의회라고 하는 <예루살렘 공의회>이다. 공의회 안에서도 논란이 많았지만 결론은 형제성에 바탕을 둔 포용성이었다. 이방인들도 한 형제라면 그들에게 강요하지 말고 형제로서 받아주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형제성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받아주는 포용성이다.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만 주장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특정인을 비방하고 몰아부쳐 매도하는 일은 형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기의 형제에게 이렇게 하겠는가? 한 부모의 피를 받은 친 형제들도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 하지만 서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걱정해주고 잘 되기를 바란다. 가끔 싸우는 일이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까지 <우리 이렇게 싸우고 있소>하고 할 정도는 아닐 것이다.
오늘 독서는 이제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새 출발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다.
그렇다! 우리는 주님의 형제요 벗이기에 서로 형제요 벗이다. 나는 과연 형제요 벗으로서 본당 공동체와 기타 단체의 구성원들을 대하고 있는가 돌아보자. 그리고 새출발 하자.
오늘이 그 악몽같은 5.18 광주민주화 항쟁 기념일이 아닌가? 한 형제끼리 치고 박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 치욕적인 날이 아닌가? 서로의 형제성을 상실하였기에 일어난 일이 아닌가?
문제가 없는 공동체가 어디있고 문제가 없는 가정이 어디 있겠는가? 형제성과 벗성으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공동체와 가정이 아름다운 공동체와 가정이 아니겠는가? 알력과 불화 중에 있는 공동체들을 위해 기도하자. 형제성으로 새출발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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