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완전한 사람"에로의 초대(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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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박미라 | 작성일2001-06-28 | 조회수2,010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완전한 사람"에로의 초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오 5, 48
창조된 피조물이며 불완전해진 사람이 스스로 완전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든 일이기만 합니다. 어떤 물건을 만든 이가 그 물건의 쓰임새나 사용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여 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물건에 대하여 알 수 없듯이,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든 목적이 무엇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사람을 만드신 분께서 직접 가르쳐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살기 시작한 이래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근본적인 문제를 알아내고 해결하고자 많은 노력을 해왔는데, 그러한 문제들을 피조물이며 불완전한 사람이 스스로 알아내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예를 들어 불교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2500년 전에 석가모니라는 한 사람이 "참 사람의 길"를 깨닫기 위해 부귀영화도 다 버리고 보리수나무 밑에서 수도를 한 결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25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분처럼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부처"가 된 사람이 과연 몇 사람이나 있었습니까? 또한 그들이 따르는 석가모니조차도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하고 그 해답이 애매모호하기만 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무"요, "허"라고.......
그런데 당신 스스로 "나는 곧 나다"(출애굽기 3, 14) 라고 말씀하시며 당신께서 이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셨으며, 사람은 무엇 때문에 만드시었고, 사람은 어떻게 해야 자신이 나온 곳으로 잘 돌아갈 수 있는지를 자세히 일러주시는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산 사람들은 그 수효를 세기가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었으나 죽지 않은 사람"으로 하늘나라에 살아있으며 살아 있다는 확실한 증거로 기적을 보여주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여 행복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믿게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걸어갔으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제가 ’알지도 못하는 당신에게 목숨을 걸고(이 글을 계속 쓴다는 그 자체가 바로 제 생명을 먹이로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 보여주려고 하는 그 길’이 과연 어떤 길인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길은 어린아이라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아주 단순하기만 한 길입니다. 이 세상 누구라도 어디에서든 어떤 처지에서든 마음만 먹으면 쉽게 갈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이 세상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 모두에게 열려있는 길이며.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하는 모든 사람이 어머니 뱃속에 생기는 그 순간부터 초대받은 길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길!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이 초대받은 길!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모든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길!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참행복에 이르게 하여 주는 길!
참 사람이 되고자 들어가는 "참행복의 길"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평등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서 사람을 판단하고 쉽게 단정을 지어버리기 일수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주인이든 노예든,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못배운 사람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지위가 낮은 사람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결혼 생활을 하는 사람이든 결혼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이든,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아무런 구별도 높고 낮음도 없이 누구나 동등한 입장에서 다만 자신을 만들어주시고 이끌어주시며 영원히 살려주시고자 갈망하시며 자신 안에 ’영’으로 또한 ’숨’으로 살아계신 ’아버지’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 ’자기의 자유의지에 의한 판단과 노력’으로 "고유하고도 고귀한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찾아내 참행복을 얻어누릴 수 있는 최상의 길입니다.
자신의 은밀한 마음 속에서 이루어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구별된 여려 형태의 삶의 모습과는 달리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모두가 동등한 다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의 "한 알의 밀알[한 마리의 물고기]"일 뿐입니다.
"한 알의 밀알"은 땅 속에 들어가 썩은 후 싹이트고 자라나 꽃이 피고 열매를 맺어 바수어지고 반죽이 되어 불 속에서 익혀진 후에 "빵이 되어 사람들에게 먹히어져 사람들의 살과 피가 되어 생명을 주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어떤 밀알은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 안에서 땅 속으로 들어가 썩은 후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어 바수어지고 반죽이 되어 불 속에서 익혀진 후에 "빵"이 되어 자신을 온전히 다 내어놓아 먹히어져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 후에 자신의 근원이신 아버지집으로 잘 돌아가 영원한 상급을 받게 되고,
어떤 밀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이 무엇인지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은 채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과 여건 안에서 눈에 보이는 세상에 있는 것들만을 중요하게 여기고 그것들을 얻기에만 급급하다가 주어진 시간이 다할 때까지도 "한 알의 밀알"인 상태 그대로 있다가 자신의 근원지로 돌아가게 되어 자신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였기에 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영원히 그 책임에 대한 추궁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있는 그 자리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신부가 되었다고, 수녀가 되었다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삶은 사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의 자리는 사람을 만드신 하느님께서 그 사람의 능력대로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자리에 배정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사람의 자리는 다 똑같이 거룩합니다. 그래서 "성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들 입으로는 "모든 자리가 거룩한 자리다"라고 말하면서도 잘못 생각하고 있기에 수도 성직자만 거룩함의 길로 가는 것으로, 가고 있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살고 있으며,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서로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어느 자리에 있든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각자 아버지 앞에 불려가게 될 때에 아버지께서는 그가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그 책임을 물으시지 않고 주어진 여건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려 최선을 다하였는지에 대하여 물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러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 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o.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P.S : 주님께서 이 말씀을 시작하실 때 첫 말씀으로 하신 "참행복"을 어떻게 살아 한 알의 밀알이 빵이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참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게 되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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