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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째 아들의 비유(10/14)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1-10-13 조회수1,646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 28주일 복음(루가 17,11-19)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루가15장)처럼 집안의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과 그것에 화가 나 집을 나간 큰 아들이 있는가하면 성서에는 나오지 않는, 늙은 아버지와 몰락한 집안의 빚만 끌어안은(아니, 물려받은) 셋째아들이 있었다.

 

이런 집안에서 흔히 보여지는 갈등의 구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망 갈 용기도 없는 셋째에게 설상가상으로 부인이 암에 걸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셋째네만이 집안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도였으므로 아무튼 새로 쓰는 성서는 그들의 몫이 되어야했다.

 

늙은 아버지는 언제나 <불행을 선택하며 사는> 분이었다.  누구나 인간은 불행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그러나 현실요법(심리학)의 글라서 박사는 많은 사람들이 불행을 선택한다고 한다.  이유는 이 아버지의 경우 그동안은 막강한 재산과 권위로 가족들을 통제했다면 지금은 급격히 악화된 건강과 현실적인 고통을 통해서 자식들을 통제할 구실을 얻어내려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불쌍한 처지에 떨어진 노인을 그렇게 냉정하게 말하는 근거는 사회적 위상과 생활이 최 상류였을 때에도 자신의 처지를 감사하는 법이 없었다는 데에 이유를 둔다.  

 

호화로운 밥상에 앉아서도 음식 타박을 하지 않으면 식구들이 오히려 이상해서 눈을 마주칠 정도였다.  태어날 때부터 부자집 삼대독자인 그분은 자신의 아버지에게도, 일생을 종처럼 살았던 부인에게도, 수족처럼 시중을 들던 자식들에게도 아니, 세상 누구에게도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는 분이 아니었다. 절대군주처럼 살았던 아버지의 불행(아니, 집안의 불행)의 씨앗은, 그렇게 감추어져 있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셋째의 불행은 <참으로 어렵게> 현실을 수용하는 시점에서부터 이상한 상황의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무렵" -뜻깊은 성서적 표현- 이웃의 신영세자 자매가 병자들을 돌보고 싶어한다는 말을 듣고,  의료보혐카드의 난이 모자랄 정도로 병원의 각과를 드나드시던 아버지의 수발을 맡기게 되었다.  자매는 그 할아버지와 똑같은 남편 때문에 숨이 막혀 쓰러지는 ’공황장애’라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당을 나오면서부터 새로운 삶을 결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잘해주어도 이기적이고 감사할 줄 모르는 남편 때문에 정신적인 병까지 얻게 되어, 사는 것이 의미가 없고 무기력하다며 ’자살충동’을 자주 느낀다는 것이었다.  미사시간만이 천국이라는 자매는 상당히 배운 수준이었으나 경제적인 여력이 있어야하겠다는 것이 궂은 일을 하겠다고 나선 동기였다.  한편의 염려도 있었으나 우선은 한달 간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었는데 그 후의 흥미로운 변화는 양쪽에서 모두 일어나고 있으니 이것을 지켜보는 구역의 식구들도 놀라워하고 있다.

 

자매는 계약보다 열 배의 일을 자청해서 하고 있고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간호를 한다.  그것은 누구에겐가 자신이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사는 기쁨과 보람이 솟는다는 것이다. 또한 자식들도 힘들어 꺼리는 일들을, 혼신을 다해 보살펴 주고 있는 자매를 보는 할아버지는 이제야 감사라는 것이, 고마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씩 배워나가고 있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했습니다’가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와 입으로 나오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달라져버렸다.  그 말 한마디가 남편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던 자매의 마음을 살리고 그 메아리는 다시 돌아와 자신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감사할 줄 아는 한 명의 나병환자가 몸도 살리고 영혼도 살린 것처럼...

 

요즈음의 두 사람의 세상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죽고 싶은 세상이 아닌가보다.

아버지의 입에서 칭찬의 말씀이 나오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셋째 아들의 집에서도 웃음이 나오기 시작한다. 죽어도 받아안기 싫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고 그렇게 자기를 송두리째 내어놓기만 하면 어떻든 부활의 기적은 일어난다는 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체험하는 눈물겨운 웃음이다.  

 

그렇게 ’셋째아들의 비유’는 새로 씌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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