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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말 진실이예요?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1-12 조회수1,736 추천수8 반대(0) 신고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말씀(요한 3 ,22-30)

 

공관복음에서는 요한이 감옥에 갇히고 나서 예수께서는 활동을 시작하시는데 비해, 요한복음은 같은 시기에 같은 고장에서 활동을 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요한복음이 사실에 가깝다면 두분은 아마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동편과 서편으로 갈라져서 활동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어느 날 사람들이 요한에게 찾아와서 당신이 증언하신 분도 강 건너편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는데 모든 사람이 그분에게 몰려가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러나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직접 세례를 베푸시지는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요한 4,2)에는 예수께서 친히 베푼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베푼 것이었다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든 사람들이 전해준 말을 듣고 요한은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신랑의 친구도 옆에 서 있다가 신랑의 목소리가 들리면 기쁨에 넘친다. 내 마음도 이런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신부(백성들)가 신랑에게 가지 않고 신랑의 친구에게 오면 그보다 민망한 일은 없을 것이다. 혹시 우둔한 신부가 신랑의 친구를 신랑인 줄 알고 눈짓을 보내도 자신은 어디까지나 신랑의 친구라는 의식을 철저히 가지고 있다면 홍경민의 ’흔들리는 우정’을 부를 필요는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종종 어떤 사람이 커져야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는 기특한 마음을 가져볼 때가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위해 자리를 양보해주고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능력을 소개해주며 밑받침을 해주느라 애를 쓰기도 한다. 이때까지는 자신도 마치 세례자 요한이나 된 것처럼 흐뭇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점점 자기보다 능력을 인정받고 영역이 넓어지며 모든 사람들의 인기를 몰고가는 경우에도 "그는 더욱 커져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마음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에는 감싸줄 수 있었던 그의 결점들이 점점 눈앞에 커다랗게 뜨이기 시작하고 올챙이 시절의 그의 행동들을 은근히 알리고 싶어지며 오늘의 그가 있기까지의 자신의 헌신적인 행동을 틈만 나면 부각하고 싶어진다. 다행히 그런 점을 그가 대신 알려주면 좋으련만, 기억조차 못하는 듯하면 배신감까지 느끼며, 소외감은 점차 커져 급기야 사이가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요한복음에서의 요한과 예수처럼 같은 영역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라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할 것이 자명하다.  

 

그러고보면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디까지나 자신보다 능력이 없다고 생각되었거나 자신을 누르고 오를 만큼의 여건이 아니었을 때에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것까지 의식하지는 못했더라도, 정말 그때는 그를 위해 자신을 얼마든지 희생하고 양보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했을 수 있다.

 

참다운 우정, 참다운 겸손이란 바로 자신의 동료가 자기보다 위에 서게 될 때도 여전히 자신이 더욱 작게 되고 그가 크게 되는 것이 "기쁨"일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어떻게 너나없이 속좁은 사람들에게 그런 아픔을 이겨내라는 것인가? 아니, 그것은 속좁은 사람들끼리 서로 바라보며 인내하고 도달하라는 경지가 아니다. 다만 그런 선물을 그에게 주신 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주님이 왜 그런 선물을 그에게 주셨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그분의 뜻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만 확고하다면 그가 성공할 때마다 "기쁨으로 가득" 찰 수 있고 한껏 박수를 칠 수 있다는 말이 아닐까?  그제서야 비로소 그가 점점 커짐에도 기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해 "주님은 더욱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고백이 속좁은 내게서도 힘차게 우러나올 수 있지 않을까?

 

오늘 내가 은근히 시기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에게는 혹시 하느님의 활동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례자 요한의 흉내를 잠시 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으로 끝까지 사는 것은 그가 온전한 ’하느님의 종’일때,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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