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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너무 쉬워도 탈이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1-18 조회수1,923 추천수13 반대(0) 신고

연중 제 1주간 금요일 말씀(마르 2,1-12)

 

코딱지만한 집은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으로 가득 차고도 넘쳐 문 앞까지 꽉 막혀버렸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서 모인 사람들이다.

 

그 때, 집안의 지붕이 벗겨내지고 천정 위에서 들것에 매달린 중풍 병자가 공중곡예를 하듯 내려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가옥구조로는 이해가 안 되는 풍경이지만,  옛날 이스라엘의 집 구조는 움집처럼 생긴 둥근 모습인데 가운데로 올라갈수록 천정이 좁아지고 맨위 꼭대기에는 가로지른 몇 개의 막대에 풀을 얹어놓았다. 연간 거의 비가 오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다. 집 밖으로는 가끔 지붕을 보수하고 갈기 위해 천정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설치해놓은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중풍병자의 네 친구들은 사다리를 통해서 천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친구를 내려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줄을 달아 균형을 맞춰 안전하게 내려보내기까지의 그들의 일치된 행동은 예수님이 낫게 하시리라는 믿음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잘못 들으면 중풍이 죄 때문에 생겼다는 것을 긍정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엔 병은 죄 때문에 하늘이 내리신 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당시만 그랬을까? 내가 병이 났더니 가까운 교우들이(심지어 말씀 봉사자까지도...) "하느님이 네게 그럴 리 없다. 뭔가 잘못된 것일거야.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라는 위로아닌 위로를 주셨다. 말을 뒤집으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 뜻대로 열심히 살지 않은 사람들이 걸리는 것이 병(또는 불행)’이라는 생각을 은연중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의도적이었다. 거기 앉아있던 율법학자의 반감을 일부러 유도하여 새로운 가르침을 주시고자 하는 목적으로 던진 말씀이라는 말이다. 즉 ’죄는 하느님만이 용서하실 수 있다’는 율법에 새로운 해석을 내려 주시려는 것이 예수님의 목적이다. 그 자리가 본래 병자치유의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던’ 자리였음을 눈여겨보았다면, 이 병자의 치유마저도 어떤 가르침을 위한 부제(副題)라는 것이다.

 

그 가르침이란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의미하지만, 더 폭넓게 해석하자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권한을 주시는 ’사람의 아들’(=사도)에게까지 넓혀진다.

 

자칫 ’신성모독’으로 고발될 만큼의 새롭고 놀라운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있던 병자가 갑자기 일어나 비틀거리는 것도 신기할텐데 깔고 있던 요까지 들고 나갈 정도의 외적 표지까지 동반하고 있었으니 모두들 "하느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아닌가?

 

또 하나의 재미있는 수수께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쉽겠느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러분은 어떤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때 당시의 사고로 돌아가서 생각해봐야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당시에 죄를 사하는 것은 어떻게 했을까? 일년에 한 번 ’속죄의 날’에 대사제만이 죄를 사할 수 있었다. 먼저 대사제는 자신의 죄부터 씻기 위해 복잡한 예식을 치르고 나서, 백성을 위해 정해진 제사를 거행하고 피를 뿌리는 예식을 통해서 죄를 사했다. 또한 백성의 편에서도 예물, 단식, 기도, 자선 등의 만만치 않은 공을 들여야 했다.

 

눈에 보이는 육신의 치유는 그 상처가 나으면 그만이지만, 눈에 보여지지 않는 치유(죄의 용서)는 증거가 없기에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야만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말씀으로 ’죄를 사한다는 것’이 믿어지겠는가?  이것은 유대교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죄사함의 효과에 대한 의심을 대변하고 있다. 오늘날도 타 종교인의 관점에서 볼 때의 고해성사의 의문점이 바로 그것 아닌가?  

 

그렇게 어려운 죄사함을 그렇게 쉽게 하시겠다는 것이 아니신가? 그렇게 쉽게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무엇으로 믿게 할 것인가? 그러니 중풍병자의 치유는 바로 ’죄 사함’의 시청각적 효과로써 쓰고 계신 것이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남편이 재작년에야 겨우 영세를 받았는데 아직까지도 고해를 못하고 있다. 대학노트로 몇 권은 되는 죄를 어떻게 다 고백할 수가 있을 것이며 그런 간단한 예식으로 사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불신이 이유이다. 마누라도 모르게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짓고 다니는 것인지 모르지만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나의 간절한 마음을 보시고 죄를 사해 주셨음 좋겠다. 어디 남편뿐이랴? 냉담까지는 아니라도 주위에는 고해성사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신자들이 꽤 많다.

 

아무래도 복음의 중풍병자와 같은 치유가 눈앞에서 펼쳐지든지, 아님 피를 한 동이씩 뒤집어쓰는 어려운 제사의식으로 돌아가야 믿어 지려나보다. 너무 쉬워도 탈, 너무 어려워도 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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