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오름과 내려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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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오상선 | 작성일2002-02-23 | 조회수1,700 | 추천수17 | 반대(0) 신고 |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기사는 여러가지 관점에서 묵상거리를 많이 제공한다.
오늘은 특별히 관상의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본다.
우리의 수많은 영적발전을 위한 노력들은 타볼산을 오르는 여정에 비할 수 있다. 산은 상쾌함과 신선함을 제공하지만 산을 오름은 많은 고통과 인내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때로는 중도에 그만 포기하고 싶은 유혹도 많이 받게 된다. 하지만 이미 정상을 정복하고 하산하여 밝은 모습으로 내려오는 선배들의 격려로 그 길을 계속하게 된다.
우리의 신앙생활 여정, 영적생활의 여정도 마찬가지이다. 시간도 내어야 하고 공부도 해야 하고 봉사도 해야 한다. 돈(?)도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비난도 받게 되고 응분의 칭찬도 누리지 못한다. 또 노력한 만큼 영적인 발전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 때문에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이미 그 여정을 끝내고 맑고 밝게 살아가는 선배 영혼들의 격려 덕분에 신앙의 여정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정상에는 무엇이 있단 말인가? 등산을 하는 이들은 정상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올라갈 때의 모습과는 그토록 다른 얼굴을 하는 것일까? 아마도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보았다는 그 신비는 표현의 차이일 뿐 정상 정복을 통해 끝없이 망망대해처럼 펼쳐지는 자연의 엄숙함 앞에 내 마음 속 깊이 다가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참이 아닐까?
사실 정상에 올라가보면 아무것도 없다. 눈에 보이는 무엇이 아니다. 그냥 바위 하나가 덩그렇게 있을 뿐이기도 하고 때론 밋밋한 봉우리일 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을 <신체험>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체험한 신체험과 우리가 정상정복을 통해 체험하는 신체험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 영적생활을 통해 추구하는 것이다. 결국 이 신체험을 위해, 즉 지복직관의 경지를 위해, 힘들지만 땀 흘리면서 신앙의 등정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상에서의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끝없이 머물고 싶은 충동을 누리게 된다. 마치 높은 지위에 오르면 그 지위를 끊임없이 누리고 싶어하듯이... 그곳에서 초막 셋을 짓고 영원히 그 지복직관의 경지를 누리고만 싶어한다.
하지만 지복직관의 경지에 오르면 그것을 누리는 것도 잠시뿐 다시 내려감의 소명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가의 <십우도>에서 소를 찾고나서는 결국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다시 하산하는 것처럼, 지복직관의 경지는 우리를 변화시켜서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을 위해 봉사토록 만들어준다. 이제서야 하산의 길, 내려감의 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이 내려감의 길은 비참해 지는 길이 아니다. 이제 새로운 소명의 길이다. 그 이전의 내가 아니라 달라진, 변화된 내가 걸어갈 길이다. 이 길은 이전에 내가 추구했던 영광의 길이 아니라 이제는 그 영광을 이미 체험했기에 수난의 길, 십자가의 길이어도 상관이 없다. 아니, 오히려 그 길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삶이 된다. 그것이 예수님의 길이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타볼산 정상에서 체험했던 환희와 영광이 이제 하산해서는 더 큰 환희와 영광으로 변할 것이고 또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관상의 길은 지복직관을 향한 길인 동시에 내려감의 길이다. 영광의 길인 동시에 다시 시작하는 참된 수난의 길이요 십자가의 길이 된다.
이것을 체득하는 사람만이 참된 소명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때는 더 이상 번뇌와 갈등은 없어진다. 그때는 더 이상 오해와 모순은 없어진다. 그때는 정말 무념무상의 경지, 무위자연의 경지가 열리게 된다.
이 길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초대하신다. 아~ 벅찬 감격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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