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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나라는 무법천지였다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3-06 조회수2,058 추천수10 반대(0) 신고

사순 제 3주간 수요일 말씀(신명 4, 1-9; 마태 5,17-19)

 

니겔 애플솝이라는 평생 정부 기관에서 일하면서 관료주의 법칙이 몸에 배여있는 사람이 천국엘 갔다. 그러나 하늘나라를 보고 매우 실망했다. 왜냐하면 그의 노련한 관료적 시각으로 볼 때, 그곳은 거의 무정부 상태였기 때문이다.

 

첫째, 어디에도 서류정리체제가 없없다. 있다면 단 하나 베드로가 가지고 다니는 생명책이라는 장부 하나가 전부였다. 둘째, 예산도 없고 어떠한 계산서도 없었다. 셋째, 모든 조직은 지위 고하가 없었다. 유일하게 천사의 계급만 9등급으로 나뉘었는데 사실상 그 계급도 모두 완전히 동일한 권리와 특권을 보장하고 있었으므로 별 의미도 없었다. 지상에서 위대하다고 불리는 성인들마저도 하늘나라의 명령체계상의 지위와 신분엔 전혀 무관심해 보였다. 넷째, 하늘나라 구석구석을 샅샅이 둘러보았지만 어디에도 계획이나 절차, 법칙 비슷한 것이나 규범 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둘러본 니겔은 하늘나라가 엄격한 의미에서 무질서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색다른 조화로움이 곳곳에 배여 있었으니까..), 합리적인 관리를 위해 마땅히 갖추고 있어야 할 절차 같은 것이 미비해 보였다. 그의 눈엔 어떻든 그런 어지러운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베드로에게 가서 불만을 털어놓고, 베드로는 그의 말을 들어주어 하늘나라 한 편 구석에 그의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 물론 그의 마음은 하늘나라의 조직을 전면적으로 개편하고 싶은 욕심이 굴뚝같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체제에 꽤 만족하고 있는 눈치여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맡은 소 행정구역의 문제점을 분류하고, 기록하고, 합리적인 방안을 마련하여 입안하고 정리하는 등, 산더미같은 일을 멋지고 효율적으로 해내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색이 하늘나라의 조직 체계를 다루는 데 있어 좀더 완전 무결한 규범과 철칙을 만들기 위해서 다른 나라들을 순회 시찰하고 싶어졌다. 베드로의 허락을 받은 그는 지상세계와 연옥, 그리고 지옥을 순찰하게 되었다.

 

그는 지상세계에서 그것도 독재주의와 전제주의 정부의 공무원들에게서 그들의 통치 이념에 맞는 치밀한 정보 수집능력과 조직관리 능력에 감탄한 후 연옥을 거쳐 지옥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자신이 천국에 세우려고 했던 바로 그 "서류나라"로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 아닌가 하였기 때문이다. 지옥의 문지기가 나와 안내를 해드리겠다고 했을 때에야 비로소 니겔은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고 천국으로 돌아왔다.

 

현장 조사에서 돌아온 니겔은 베드로를 찾아가 질문했다.

"베드로님, 말씀해 주세요. 사람이 온 힘을 다해 법칙을 존중하며 준수하는 게 뭐가 잘못된 겁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요. 법칙보다 사람을 한층 더 존중한다면 말이오. 하늘나라와 지옥의 차이점은 바로 그거요. 지옥에서는 사람보다는 법칙을 더 중히 여기지요. 그러니 거기엔 서류인간만이 존재하죠. 반면, 하늘나라에서는 법칙보다는 사람을 더 귀중하게 여기지요. 그래서 이곳엔 법이 살지 않고 사람이 살지요."

"그렇다면 저야말로 지상에서 완벽한 서류인간, 즉 원리원칙만 내세우는 극히 행정적인 관리인이었는데,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죠?"

 

성베드로는 짓궂게 말했다.

"당신이 완벽한 서류인간이었다고요?"  그는 손의 장부-생명책-를 펴들었다. "자네는 과부와 노인과 불구자를 슬쩍 봐주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세 번 법칙을 위반한 적이 있구만. 그 보상으로 하늘나라 입장이 허락된 것일세." (닐 기유메트의 "영혼에서 샘솟는 아름다운 이야기"중 "서류인간"을 약간 수정 요약했음)

 

그렇다. 법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율법의 근간이 되는 십계명도 하느님이 자신을 위해 사람에게 지키기를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선물은 기쁘게 복되게 사용하는 것이지, 그것을 짐처럼 여겨서도 안되고 그것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될 것이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율법이 완성되는 곳이다. 법으로 다스려지는 왕국이 아니라, 법은 있으되 법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덕으로 사랑으로 다스려지는 왕국이다.  그곳 시민은 누구나 스스로 사랑의 법을 따라 살기에, 법이 있었는지 조차 모른다. 그래서 하늘나라는 얼핏 보기엔 무법천지처럼 보이는가보다.  법을 모르고 살기에 "일점 일획도 수정되거나 폐기되는 일도 없는" 것일지 모른다. 그만큼 법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말일 것이다.

 

그곳 사람들은 이미 법대로 살고 있기에 법이 있다고 새삼 들어도 별다른 불편이 없다. 오히려 자신들이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음에 기쁨을 확인할 따름이다. 그런데 율법, 법규, 법령, 규정, 계명, 이런 단어만 들어도 마음이 옥죄는 듯하다면 아직 하늘나라 시민이 아니라는 말이지 않을까? 아니면 법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면 율법과 계명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너무 짐스러운 의무의 개념만 강조했던 것은 아닐까?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예수께서는 지금 우리 마음 안에 법을 완성하는 하늘나라를 건설하시고 싶어하신다. 그리고 마음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나라가 법치를 넘어선 덕치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

 

사순절에도 지켜야 할 작은 계명은 많다. 계명을 지키되 그 계명을 얼마나 실천했는지를 꼽아보고 자만할 것도 아니요. 실천하지 못했다고 죄책감에 시달릴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작은 우리 가정 안에서라도 먼저 덕과 사랑이 실현되는 하늘나라를 만들어야 함이 참으로 율법을 완성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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