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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의 귀는 온전한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3-22 조회수1,654 추천수9 반대(0) 신고

사순 제5주간 목요일 복음(요한 8,51-59)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유다인들이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있음을 답답하게 바라보게 된다. 분명히 같은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는데도 상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해에 오해가 가중되는 것이다.

 

오늘 있었던 일이다. 부활절이 얼마 남지않은 시점에서, 교수 신부님이 ’부활 신앙’을 재정립해주시고자 고린토 전서 15장의 ’부활’에 관한 이야기와 네 복음서에 나타난 부활 사건을 여러각도에서 비교 분석해주시며 부활에 대해 성서저자들이 전달받았던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시려고 하였다.

 

전 주에 미리 한번 읽어보고 생각해오라고 말씀하셨으나 오늘 미리 읽어본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았다.

 

고린토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따로 한 장의 분량을 할애해서 부활에 관해 일일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분명 그 당시 부활에 관해 그만큼 납득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편지 안에는 부활에 관한 사람들의 질문들이 많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바울로 사도는 그 질문에 대한 사목적 가르침을 주고자 편지를 쓰게 되었다.

 

당시 고린토 교회에서는 죽은 이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던 일부의 관습도 있었던 듯하고,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에 대한 의심도 있었고, 부활의 순서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도 있었고, 부활하면 어떤 형태로 되는지에 대해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부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납득이 안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지금은 다를까?)

 

이런 의심과 질문들에 대해 하나씩 답변해가는 바울로의 설명이 15장이다. 또한 그 장은 최고로 오래된 전승을 담고 있으며 그 전승의 중요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고백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연 이 구절 하나 하나, 단어의 원 뜻에 대한 설명들...예를 들어 시제는 어떤 시제가 쓰였는지, 단순 과거형인지, 현재 완료형인지, 그렇게 다르게 쓴 의도가 무엇인지 하나하나 설명하셨다.

 

또한 ’부활’을 의미하는 다른 표현으로 "일으켜지다"라는 수동태를 쓰고 있는 이유에 대한 설명등 아주 세심한 것들이지만 단어의 시제나 형태가 주는 강조점이 다르기 때문에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부활에 관한 성서 여러 곳을 비교해가며 총체적으로 볼 수 있도록 안내 해주셨는데.... 결과는 어떠했을까?

사람들은 수업이 끝나고 이런 것을 왜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어렵고 <쓸데없는 것>을 하신다고 투덜대기만 했다.

 

그렇긴 하다. 그것을 알지 못해도 ’부활 신앙’은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맨 처음 ’자신이 죽으면 부활할 것이라 믿는가?’하는 질문에 삼분의 일 밖에 손을 들지 못한 우리들의 현주소를 떠올리면, 왜 교수 신부님이 우리에게 초대 교회에서 예수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는지 좀 더 자세히 알려주려고 고심하셨는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들의 귀가 어둡고, 자신들의 앎이 부족하고, 앎의 욕구가 없다는 사실에는 둔감했다. (적어도 한 주 전에 예고해주었어도 모두 귓등으로 흘려듣고 읽어오지도 않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자신의 귀에 이상이 있음을 깨달아 아는 것도, 어느 정도는 들을 귀가 생겨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의 경우도 과거에 성서 주석서를 보면서 이런 부분을 왜 이렇게 여러 장에 걸쳐 해설을 하고 있는지 골치 아프다고 제껴놓았는데, 비로소 그 강의를 듣고 왜 성서저자들이 하필 그 시제나 그 형태를 써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알아 들을 수 있었으니까...

 

사실 강의를 듣는다고 하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이 알고 있어야 들리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 하지만 실은 자기가 아는 부분만 듣게 되어있다. 알지 못하는 분야, 관심없는 분야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마련이다. 그래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오늘 복음도 예수님은 아버지를 알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이다. 아버지를 본 사람은 없다. 그러기에 아버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온 것이지만 그 사실을 믿기엔 너무나 난관이 많은 것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기 위해선 먼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그릇된 하느님에 관한 지식의 바구니를 비워야 한다. 그리고 겸손되이 새로운 가르침을 바구니에 담아야 한다. 자신들이 잘못 알고있는 신관을 바로 잡지 않고선, 또는 자신들이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선 계속 예수는 마귀 들린 사람이요. 헛소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아니 신성 모독죄를 저지르는 돌팔매 당할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눈은? 우리의 귀는 온전한가?

우리가 하느님에 관해 알려하고 공부하고 배우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를 지식으로 알아들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통해서 선조들이 체험한 <신앙>이 무엇인지 알므로써 자신도 올바른 신앙의 길을 갈수 있고, 자신이 전달받은 신앙에 확신을 갖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신학에 관한 강의를 듣고 각종 신학서적을 들여다 본들 내 자신 부활을 체험하지 못하면 참된 부활신앙을 갖을 수 없다 하신 신부님의 말씀처럼... 우리도 귀로 눈으로만 하느님을 알려고 해서는 결코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정말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면 그분을 체험하여 알게 되는 것이 가장 올바른 지름길이리라.

 

그분을 체험하는 길... 그것은 그분의 말씀대로 살아보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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