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개가 될 수 있는가?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2-08-07 조회수1,213 추천수10 반대(0) 신고

연중 제 18주간 수요일 말씀(예레 31, 1-7; 마태 15,21-28)

 

사전오기(四轉五起)의 신화는 홍수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가나안 여자는 무려 4번이나 넉다운이 되었으나 5번째 일어나 마침내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과의 시합에서...

 

마귀를 한 말씀으로 쫓아낸다는 분이 자기 고장에 나타났을 때, 그녀는 한걸음에 찾아갔다. 마귀가 들려 몹시 시달리고 있는 딸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라고 간청하는 여자는 이미 그분이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있던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비롭다고 소문이 난 그분은 그녀의 간청을 묵살해 버렸다. 어려운 간청을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어떤 설명도 없는 침묵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욕적인 것인지 알 것이다. 차라리 못하겠다는 거절이라도 해야 최소한의 예의다.

 

그분의 태도가 미안한 표정이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태도는 아니었던 듯하다. 오죽하면 옆에 있는 제자들이 나서서 ’저 여자를 돌려보내시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할 정도였겠는가? 여인은 그분의 측근들에게서도 멸시를 당하고 있다. 두 번째 얻어맞은 것이다.

 

힘을 가지고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서 거절당하는 것보다 아무 역량도 없는 주위 사람들에게 거부당하고 방해당해본 경험이 있다면 여인이 얼마나 분노가 끓을지 알 것이다.

 

"나는 길 잃은 양과 같은 이스라엘 백성만을 찾아 돌보라고 해서 왔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말씀은 어디로 간 것인가? 돼지 떼가 우글거리는 이방인 지역 가다라 지방에서는 마귀 들린 사람을 고쳐준 적도 있다는데(5,1-20) 그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결국은 때에 따라, 기분에 따라 논리에 맞지 않는 핑계를 대며 철저하게 냉대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여인은 세 번째 얻어맞는다.

 

"주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여인은 또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이스라엘의 메시아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 ’주님’이라고 부르며...  그렇다. 비논리적인 그 어설픈 핑계를 넘어서 만백성의 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용기와 끈기가 대단하지 않은가?

 

하늘도 움직일 만큼의 애절한 기도도 다시 외면하시는 하느님. 그분의 속사정을 우리는 모른다. 인간의 고통에 때로 하느님은 무관심하고 냉소적인 듯 보여도 그것은 다만 우리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분은 인간 하나 하나의 개별적 사정을 다 들어주시지 못할 사정이 있으실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분은 드넓은 세계를 관장하시기에 우리가 모르는 깊은 까닭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지 않는가.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아무리 우리가 이해 못할 속사정이 있으셔도 친절하게 말씀해주시면 슬프지만 납득할 수 있을 것을... 욥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하느님의 길이 있고, 인간은 인간의 길이 있는 것이라고 훈계하셔도 눈물을 머금고 부복할 수 있을 것을...

 

인간을 짐승으로 비하시키며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비웃으실 수 있는가. 그 비유야말로 옳지 않다고 대들고 싶어진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는 눈씻고 찾아볼 수 없는 몰인정한 당신이 과연 하느님이신가. 도와주실 수 없으면 그만이지 사람을 이렇게까지 짓밟을 수 있는가. 이제까지 주님이라고 부르며 엎드려 있던 한 인간에 대한 최고의 욕이며 모독이다. 여인은 이젠 쇠망치로 강타를 당한 것이다.

 

나가 떨어져 다시는 꼼짝 못해야 할 여인이 비틀비틀 다시 일어섰다. 그녀의 마지막 사력을 다한 말, "주님, 그렇긴 합니다마는 강아지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주워 먹지 않습니까?"

 

홍수환이 마지막으로 일어나 비틀비틀 카라스키야를 때려누일 때보다 더한 감격의 눈물이 흐른다. "여인아, 참으로 네 믿음이 장하다! 네 소원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여인의 소원이 무엇이었던가? 자신의 부귀 영화였던가? 자신의 무병 장수였던가? 아니다. 침묵과 멸시와 냉소와 비인간적 모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했던 것은 자식에 대한 사랑이었다. 여인의 끈질긴 기도가 하느님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느님은 처음부터 침묵과 부재와 냉소와 비정으로 일관하셨고 여인은 점점 더 낮아지고 깊이 있는 신앙으로 변화된 것을 눈여겨 보아야할 것이다. 어쩌면 그분의 이상스런 태도는 그것에 목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일이 어느 날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긴 여정 속에서 이러한 하느님을 우리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여인의 신앙을 생각해볼 때, 그녀는 한번도 그분의 부조리한 말씀을, 그분의 불합리한 처사를 인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인생은 이런 부조리와 불합리의 현실이 더 많은 곳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인은 그것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으로 뛰어 들어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사력을 다해 하고 있다.

 

그녀는 소외를 벗어나려 위안을 찾아 헤매지도 않으며, 멸시를 당한 분노를 삭여줄 동료를 구하지도 않는다. 비웃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엎드려 구걸하는 인내와 용기까지 있다. 배척을 하면 더 구석으로 비껴가고 누르면 더 아래로 내려갈 여유마저 생긴 것이다.

 

하느님이 냉대하신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럼 아직 개가 될 용기를 가지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그분께 대한 신뢰가 깊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자신의 일에 사력을 다하고 있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쩌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깊이 사랑하고 있지 않은지도 모른다.

 

하느님을 움직이려 하면.... 내가 먼저 움직일 수 있어야한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