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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문과 진실 2 (9/27)
작성자오상선 쪽지 캡슐 작성일2002-09-27 조회수1,526 추천수13 반대(0) 신고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실 때에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그들에게 질문하여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대답하여

"요한 세례자라고도 하고

다른 이들은 엘리야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들은 옛날에 활약한 어느 예언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합니다"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러면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합니까?" 하시니

베드로가 대답하여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했다.

그러자 그분은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을 나무라시고 엄명하셨다(루가 9, 18-21)

 

 

<소문과 진실 2>

 

헤로데가 예수의 소문에 관심이 있었다면

오늘은 그 소문의 주인공인 예수님은

그 소문에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볼 수 있다.

헤로데가 들은 소문이 3가지였듯이

예수님은 먼저 소문의 진상을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제자들에게도 그 소문의 내용을 물어보신다.

제자들 또한 헤로데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소문을 들었음이 증명된다.

세례자 요한, 아니면 엘리야, 아니면 옛 예언자 중의 한 분의 화신이라는 것.

 

그리고는

그럼 너희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되물으신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마도 이런 질문이 없었더라면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는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의 신원을 정확히 알 수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세인들과 비슷한 평가와 판단을 내릴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이 질문은

소문을 기초로 하여 진실을 찾아라는 어제 이야기의 계속이라고 할 수 있다.

헤로데가 진실을 찾고자 열망했듯이

제자들에게도 진실을 추구하라는 제시요 양성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내가 누구인지를 직접 강의하시며 가르치시지 않고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짐으로써

당신이 누구인지를 깊이 있게 다시 숙고하게 만드신다.

그 결과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는 1번도 2번도 3번도 아닌

제4의 답을 찾아낸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 정답이었다.

 

사실 어쩌면

예수님도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분명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특별한 소명을 주셔서 파견하셨다는 것은 알겠지만

자신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자신도 자신이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는데

세인들로부터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풍문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엘리야라고???

옛 예언자 중의 하나라고???

그건 아니었다.

소문의 주인공은 실상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자신이 누가 아닌지는 정확히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가는 이 에피소드의 서두를

<예수께서 혼자 기도하고 계실 때>라고 적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홀로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신원에 대해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었고

예수님 또한 그 답을 찾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느님의 그리스도>

<하느님께서 파견한 사람>

<하느님이 축성한 사람>

적어도 자신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보내시는구나 하는 소명은 확실히 알 수 있었기에

가능한 답이 아니었을까?

베드로 사도의 답이 정답이라는 것은

적어도 하느님의 사람이요 하느님이 나를 그렇게 시키고 있음을

예수님 스스로 강력하게 느끼고 있었기에 그렇다고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아닐까?

 

우리 또한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호할 때가 많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그렇다면 나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은 어때야 할까?

예수님의 방법론을 한번 도입해 봄은 어떨까?

 

먼저 항상 나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전제는

<소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소문은 진실은 아니지만 진실로 가는 정보요 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해 주는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평가가 진짜라고 여긴다면 그것이 실수이다.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보통 우리는 남이 우리를 좋게 평가하면 흐뭇해 하고

나쁘게 평가하면 열을 받아 어찌할 줄을 모르는데

이 둘 모두가 틀린 자세이다.

남이 우리를 좋게 평가하는 것도 실제의 내가 아니고

나쁘게 평가하는 것도 실제로 내가 아닌

허상이요 거짓인데 그것을 참인양 착각함에서 비롯되는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소문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고

나 자신을 알기 위한 정보의 창구 쯤으로 받아들이자.

 

두번째로는

특히 나와 함께 사는 이들에게도

세인들의 그 소문이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보자.

일반적으로 내가 아닌 타자는 비슷한 평가를 할 가능성이 많을 것이다.

나의 가족, 친구, 형제들에게도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겸손되이 물어볼 일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럼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이야기 해 달라고

청해 볼 일이다.

이러한 자세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이다.

내가 겸손되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는 자세가 되어야만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물어보는 일이다.

<주님, 저는 도대체 누구입니까?>

뭇 성인들은 항상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느님 당신은 누구시고 이 벌레만도 못한 나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홀로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던진 화두가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나 또한 적어도

나는 뛰어봤자 하느님 손바닥 안이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이 나를 늘 강력하게 이끌고 가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때론 끌려가고 싶어하지 않으면서도 결국 끌려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의 신원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바로 내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일 수도 있지 않을까?

거창한 의미의 구세주가 아니라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하느님의 도구가 되도록 불리움 받은 존재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마르꼬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고 적고 있는데

루가는 <하느님의 그리스도>라 적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하느님의 사람>이다!

이것을 더 깊이 깨달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요 수도생활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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