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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절망적인 신뢰
작성자은표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3-04-11 조회수1,244 추천수6 반대(0) 신고

 

                       ☞   절망적인 신뢰  ☜

성서에 있어서 신{神}의 의{義}란 많은 사람을 실족{失足}케 한다. 神의 義는 불의한 우리

를 따돌리기에, 우리는 義로운 神께 도저히 접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神의 義는 확실히 그런 면{面}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를 따돌릴 뿐만 아니

라, 우리를 심판{審判}하고, 그래서 불의{不義}한 우리에게는 神의 분노{忿怒}가 언제나 닥쳐오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神으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타페{墮敗}되어진 영혼의 무력

{無力}과 고독{孤獨}에  참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어떻게 성서의 신앙을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겠는가?  무력{無力}과 고독{孤獨}에 우리가 울기를 그치지 아니

하고, 神의 분노 앞에 벌벌 떤 채, 神의 심판{審判}에 직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혼의 진상{眞相}을 참으로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이 주장되어진다면, 구원은 도저히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놓고 절망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착실한 영혼은 몇 번이고 깊이 이러한 절망에 신음한 연후에 구원의 환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수도원에서 많은 성인 성녀들이 그랬던 것이

다. 이들 성자{聖者}들은 神의 義를 우리들로부터 요구하는 義로 생각하고 고민했으며 그리고 神이 우리에게 주는 義라고 하는 거기에 확신을 갖고 구원에 들어간 것이다.

 

영혼의 타패{墮敗}와 무력에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제 절망에만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

라, 이 절망을 딛고 일어서 일보{一步}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일보』{一步}야말로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일보인 것이다.자기의 절망을 초월해서 神께의 자포자기를 하기까지

의 신뢰 속으로만이 돌입할 때 그때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때의 이 신앙

을 신뢰적 절망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절망의 한 복판에서 십자가에 나타난 神의 義에 우리

가 매달릴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神의 義에 고착한다는 표현도 같은 것이다. 우리를 이탈하려는 神의 義, 그것에 메달리는 것을 우리는 신앙이라고 한다. 이때 神의 義, 그것은 실은 神의 사랑{愛}의 가면에 불과

하다. 이것은 마치 어린애가 노하신 아버지의 매를 맞으면서도 아버지께 매달린다면 노하신 아버지도 절망적인 신뢰를 하고 있는 아들을 향해서 그냥 웃음을 터뜨리고 말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상정{常情}이다. 神도 마찬가지다. 사랑하기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이다. 아버지는 무조건 아들을 포용한 채 아들의 죄를 놓고 같이 울고 결국은 죄를 용서해 주고 만다.『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죽었던 내 아들이 다시 살아왔다....』{루까 15: 20-24.} 죄를 사하고 구해 주는 것은 여기서 성취되는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절망적인 신뢰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절망을 돌파하지 못하는 거기에 참다운 절망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인류의 불의를 놓고 분노를하는 神의『노함』의 매에 편태 당하면서도 아버지인 神께 매달린 채, 일탈하지 않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절망적 신뢰에 우가 기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절망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이다.

 

PS: 김정원 신부님의 강론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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