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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향기 (부활성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4-19 조회수1,945 추천수5 반대(0) 신고

◎ 2003년 4월 19일 (토) - 부활성야

 

[오늘의 복음]  마르 16,1-7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다.>

 

[성토요일]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내가 아무 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 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8-29)

예수님은 참으로 돌아가셨고 무덤에 묻히셨다. 예수님은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셨으며, 인간실존이 경험해야만 하는 가장 부정적이고, 두렵고, 비참한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셨다. 그러나 우리는 희망하고 또 알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 인간의 죽을 운명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을... 이것이 바로 교회가 오늘 제단도, 감실도 비워둔 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성토요일의 무언(無言)의 메시지이다.

 

[부활성야]

성토요일이 전하는 무언(無言)의 메시지가 성취되는 밤이다. 일년 365번의 밤들 중에 가장 거룩하고 성대한 밤이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밤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부활성야 예식을 함께 치러본 사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 왜 "부활신앙"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부활 성야 예식은 총 4부로 이루어진다. 먼저 제1부에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간과 공간, 생명과 빛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빛의 예식을 거행하고, 부활 찬송을 노래한다. 제2부 말씀 전례에서는 주 하느님께서 세상창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펼치신 놀라운 업적을 묵상한다. 우선 구약성서에서 7개의 독서(창세기 1장/천지창조; 창세기 22장/성조 아브라함의 제사; 출애굽기 14장/홍해를 건너다; 이사야 54장/새로운 예루살렘; 이사야 55장/구원의 보편성; 바룩서 3장/지혜의 샘; 에제키엘 36장/새 마음과 새 영)가 봉독되고 매 독서 후에 장엄한 기도를 바친다. 대영광송과 본기도 후에 신약성서 서간독서(로마서 6장/불멸의 그리스도)와 복음(마르코 16장/예수의 부활)이 잇따른다. 제3부는 세례예식이다. 선발된 예비신자들에게 물로 씻어 새로 태어나게 하는 세례성사를 베풀고, 기존의 신자들은 자신의 세례서약을 갱신한다. 이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묻히심과 부활에 동참함을 의미한다. 제4부는 성찬전례로서 새로 태어난 신자들과 함께 모든 신자들이 성목요일 저녁 주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성금요일 십자가 제사로 완성하신 성체성사의 성찬에 초대받는다. 이 성찬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여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것이다.

 

[복음의 향기]

어제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욕설과 조롱도, 침 뱉음과 모욕적인 발언도, 무자비한 채찍질과 구타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도 예수님의 인간적이고 하느님적인 사랑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보았다. 자기에게 모든 불리한 것을 참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간 예수님은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었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즉시, 바로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사건들을 전하고 있다.(마태 27,51-53) 사태는 분명히 돌변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지키고 있던 백인대장과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하고 고백했다.(마태 27,54)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그분의 신성이 그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세계의 역사에는 또 다른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시작되었다. 예수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드러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인류의 역사가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누리지 못할 최대의 승리이다. 이는 죄에 대한 승리요,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 곧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었고,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온갖 분노와 모욕을 불러일으킨 일이었지만, 예수님의 공생활 중 모든 가르침과 행동의 마지막 책임 있는 결론이 십자가상 죽음이라면, 오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믿고, 경축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그분이 일찍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영원히 살 것"(요한 11,25)이라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죽음으로 끝나거나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자에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란 거짓에 뿌리를 둘 수 없다. 참된 믿음은 변할 수 없는 "진리"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분 삶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진리임을 증명해 주신 것이다. 진리는 불멸한다. 죽을 수 없다. 만약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느님 편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우리 인간들 편에서 진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관한 믿음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막달라 여자 마리아에게 "아직 나를 붙잡지 말라"(요한 20,17)고 말씀하셨듯이 믿음이란 잡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소유가 분명히 아니다. 예수부활에 관한 우리들 믿음은 결국 하나의 도전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하는 도전인 것이다. 이 도전이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만 갑자기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첫날 아침부터 그랬다. 오늘 복음이 전하고 있듯이,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주검이 아니라 빈 무덤과 젊은이의 메시지가 전부였다. 오늘 복음은 7절로 끝나지만 8절을 보면, 여인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 무덤 밖으로 나와 도망쳐 버렸고, 그 이후 너무도 무서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였다고 한다. 오늘 밤 우리가 들은 복음(16, 1-7)은 이어지는 8절과 함께 사실상 마르코복음의 마지막 부분이었다. 성서학자들은 16장 9절부터 22절까지, 막달라 마리아를 재차 언급한 것을 포함하여 제자들의 사명과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기사는 마르코가 아닌 제3자가 나중에 첨가한 것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여인들이 발견하여 얻은 것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빈 무덤"에 대한 믿음, 즉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뿐이었다. 이것이 오늘 부활성야미사가 들려주는 복음이다. 어쩌면 우리는 오늘 밤 예수님 부활을 경축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무덤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경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그러나 예수부활에 대한 신앙은 단번에 주어지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가꾸어 가야 하는 믿음이 아니겠는가? - GoodNews 가족 여러분! 예수님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신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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