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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향기 (부활축제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4-25 조회수1,358 추천수4 반대(0) 신고

◎ 2003년 4월 25일 (금) - 부활팔일축제 금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21,1-14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 주시고 또 생선도 주셨다.>

 

[복음의 향기]

 

우리는 지난 부활 팔일축제 내 화요일 복음묵상을 통하여 요한복음의 원복음은 20장을 마지막으로 편집되었고, 21장은 추가로 편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통상 21장의 저자는 요한복음의 원저자를 추종하던 요한학파에 속하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21장을 단락으로 구분하면, 티베리아 호수에서 일곱 제자에게 발현한 예수(1-14절), 부활예수와 수제자(首弟子)인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묘사(15-19절) 및 사명전달, 예수와 애제자(愛弟子)의 관계(20-24절), 그리고 에필로그(25절)의 4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한복음 21장을 추가로 편집해야 했던 이유는 21장 전체에 짙게 깔려있다. 즉, 예수님을 이미 배반한 적이 있는 베드로(요한 18,15-18.25-27)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단의 으뜸으로, 그리고 초대교회의 수장(首長)으로 인정하고 내세우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특별한 관계를 엮어주려는 의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베드로" 라는 이름도 지나칠 정도로 빈번히 등장한다. 신약성서 전체에 베드로의 이름은 총 198번 기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9번(1고린 4번, 갈라 3번, 1베드 2번)을 빼고는 모두 4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두루 등장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총 40번 베드로의 이름이 발견되는데, 이를 구분하여 보면,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5번,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 죽음 직전까지 18번, 부활사화 20장에서 4번, 부활사화 추가부분인 21장에서 13번 등장한다. 아무튼 성서학자들은 21장의 저자가 초대교회 안에서 차지하는 베드로의 교회론적이고 사목적인 주도역할을 강조하고 있다고 본다. 편집자의 의도가 이렇다 보니 의도의 일관성과 성취도는 보장되지만, 이야기 전체가 구도상의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구도상의 문제점은 여기 저기서 발견된다. 우선 앞서간 20장의 내용과 연결이 잘 되지 않고 있다. 20장의 무대는 예루살렘이고, 여기서 제자들은 이미 두 번이나 부활예수의 발현을 체험했었다. 저자는 단순히 "그 뒤"라는 표현으로 예루살렘과 티베리아 호수의 연결점을 찾고 있다. 참고로 티베리아 호수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지명으로서(요한 6,1; 6,23) 다른 복음서의 갈릴래아나 겐네사렛(마태 14,34; 마르 6,53; 루가 5,1)과 같은 호수를 말한다. 밤새도록 베드로를 포함한 일곱 제자들은 헛수고를 했다. 원래 어부출신이었던 그들의 실력이 떨어진 것일까? 3년간 고기잡이에서 손을 뗐으니 그럴 법도 하다. 새벽녘 호숫가에 서 계신 예수와 베드로의 배까지 거리가 제법 멀다고 느껴지는 100미터나(8절) 되지만, 쌍방의 대화는 아주 가깝게 이루어진다. 애제자(愛弟子)가 "저분은 주님이십니다" 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그냥 물 속에 뛰어 든 점도 이상하다. 베드로는 육지까지 헤엄쳐 나왔다는 결론이다. 물론 그런 말은 없다. 일행이 육지에 올라 왔을 때, 예수께서는 숯불과 빵과 이미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방금 잡은 생선 몇 마리를 가져오라고 한다. 차라리 준비 없이 생선을 가져오라고 했다면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구도상의 문제점이 아니다. 물론 요한복음의 원저자는 구도상의 논리(論理)를 상당히 중요시하였다. 요한복음(1장-20장) 전체가 장고(長考)의 성찰(省察)과 명상(冥想)에 의한 결론이 아니던가. 그러나 21장의 저자는 구도상의 논리보다는 상징적이고 신비적인 표현을 통하여 베드로와 부활예수, 그리고 교회의 긴밀한 삼각관계를 조명(照明)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가운데 베드로의 역할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21장의 무대를 갈릴래아(티베리아)로 옮긴 것은 제자들이 처음으로 예수를 만났던 곳이 이곳이라는 점을 상기시킨다. 베드로를 비롯한 일곱 제자가 배를 탔다고 했는데, 배는 교회를, 7이라는 숫자가 풍요와 완전(完全)을 뜻한다. 그들만의 수고는 헛되었지만 부활예수의 지시(指示)와 명령을 따름은 성취와 보람과 기쁨을 가져온다. 그물에 걸려든 고기의 숫자가 "153마리" 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학자들은 통상 아우구스티노의 해석법을 따르는데, 이들에 의하면 153은 1부터 17까지의 수를 다 합한 것으로 보편성과 완전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17 또한 10이라는 완전수와 7이라는 완전수를 합한 절대완전수를 의미한다. 총 153장으로 구성된 [기도론]을 저술한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99)는 153의 숫자를 아주 색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안셀름 그륀, 정하돈역, 부활의 기쁨, 100배 맛보기, 118-121쪽 참조)

 

오늘 복음이 필자의 머리에 남기는 점은 제자들이 갈릴래아(티베리아) 호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체험을 완결했다고 하는 것이다. 갈릴래아 호수가 어떤 곳인가? 그들이 예수와 처음으로 만난 곳이며, 그들이 불림을 받았던 곳이다. 여기에서 그들은 예수와 동고동락(同苦同樂)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부활체험의 완성은 초심(初心)에 있다는 말이다. 그들이 이곳 갈릴래아에서 원래 하던 고기잡이를 통하여 부활예수를 뵙게된 점도 중요하다. 부활체험의 장소가 일상(日常) 속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초심(初心)과 일상(日常)에서 우리의 부활체험이 이루어집니다. -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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