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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의 향기 (부활3주간 수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5-07 조회수1,540 추천수8 반대(0) 신고

◎ 2003년 5월 7일 (수) - 부활 제3주간 수요일

 

[오늘의 복음]  요한 6,35-40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내 아버지의 뜻이다.>

 

[복음의 향기]

 

오늘 복음의 도입은 어제 복음의 마지막 절을 되풀이하고 있다.(35절) 사람들이 예수께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늘의 빵"을 청하자,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심을 선포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으로서 모든 생명의 허기짐과 타는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결국 생명의 빵을 얻기 위해서는 그분에게 가야하며, 그분에게 가는 것은 그분을 믿는 것이 된다. 믿음을 가지는 데 굳이 기적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면 예수님 스스로가 기적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생명의 빵"이라는 선포는 예수님 자신에 대한 결정적인 신적(神的) 계시(啓示)이며, 이 계시가 바로 기적인 것이다. 누구든지 이 기적을 "본다"면 "믿음"안에 안주하게 된다.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봄"은 "눈먼 것"과 같은 것이며, 나아가 "죄"가 될 수도 있다. "너희가 차라리 눈먼 사람이라면 오히려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지금 눈이 잘 보인다고 하니 너희의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그러므로 기적 자체이신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이 생명의 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향정립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불신을 지적하신다.(36절) 이 불신(不信)은 당장 이 자리(가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이 드러낸 불신이 아니라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의미한다. 유다인들이 믿음의 조건으로 기적을 요구한다면, 이미 충분한 기적이 전제되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이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지금까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계시하신 기적(표징)은 여럿 있었다. 실제적 상황으로 보도된 기적사화는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기적(2,1-11), 고관아들을 치유한 기적(4,46-54), 베짜타 못가에서 행하신 중풍병자의 치유기적(5,1-18), 그리고 6장의 빵의 기적과 물위를 걸으신 기적이다. 그 외에도 예수께서는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다.(2,23 / 단순설명 형식의 보도) 이렇게 열거한 기적사화의 보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각각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됨을 알 수 있다.(6장 제외)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은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나 말씀을 통하여 사람들이 "믿게 되었다" 라는 표현이 요한복음에서만 읽을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믿게 되었다" 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첫 번째 기적을 갈릴래아 지방 가나에서 행하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2,11) "제자들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뒤에야 이 말씀을 생각하고 비로소 성서의 말씀과 예수의 말씀을 믿게 되었다."(2,22) "예수께서는 과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머무르시는 동안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2,23) "그 동네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 여자가 자기의 지난 일을 예수께서 다 알아 맞히셨다고 한 증언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4,39)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4,41)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8,30) "많은 사람이 거기에서 예수를 믿게 되었다."(10,42) "마리아를 찾아 왔다가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11,45)

 

이에 비하여 공관복음서는 예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이나 말씀 끝에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믿음"의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대부분이 반응적 기록 없이 다음 사건보도로 옮겨가거나 기록이 있다면 "도대체 이분이 누구인가?"(마태 8,27),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마태 9,8; 마태 15,31; 마르 2,12; 루가 6,26),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마태 9,26; 마르 1,28; 루가 4,14), "하느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와 주셨다"(루가 7,16) 라는 표현이나 놀라움, 두려움, 기뻐함, 따라 나섬 등의 표현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를 예수님께서 밝히신다.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 주신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거꾸로 아들에게 맡겨진 사람은 누구나 (자동적으로) 예수께 올 것이며, 예수께 오는 사람 결코 외면 당하지 않고(37절), 예수께서 이들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모두 살려서(39절),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다(40절)는 말씀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이 뜻을 이루기 위해 예수께서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시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유의할 점은 "아들에게 맡겨지지 않은 사람"들은 자동적인 불신자(不信者)들로서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은 거꾸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누구든지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사람" 대열에 들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비록 유다인들의 총체적인 불신을 지적하시지만, 앞서 요한복음의 "믿게 되었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기록들에서 보았듯이, 매번 당신이 행하시는 기적과 말씀을 통하여 신자(信者)를 얻으셨다. 그러므로 "믿는 행위"와 "아들에게 맡겨짐"은 동시(同時)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자는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맡겨주신 자들이며, 이들을 예수께서는 지켜주시고 살려주시어 영원한 생명에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다시 한번 믿음의 자유성과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 대한 인간의 자유 의지적인 믿음은 동시에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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