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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죄의식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3-08-18 조회수1,246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말씀(판관 2,11-19: 마태 19,16-22)

 

독서는 BC. 7세기의 신명기계 역사가들의 역사관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진 후, 반쪽인 북부 이스라엘왕국은 이미 이민족 아시리아에게 패망해버리고,  남은 반쪽인 유다왕국마저 위태위태한 가운데에서 지나온 역사를 회고했다.

 

하느님이 처음 선택해주셨을 때 들려주셨던 사랑의 굳은 맹세, 그 약속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하느님은 그 언약을 잊으셨던가? 아니다. 하느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신명기계 역사가들이 내린 결론은 바로 오늘의 독서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래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못된 짓, 그중에서도 주변 민족이 섬기는 신들을 따르며 절하는 이른바 ’우상숭배’가 가장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런 큰 죄를 저지르고 잘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분명 그들은 시나이에서, 또 세겜에서, 주 야훼 하느님만 섬기고, 그분의 계명을 따르겠다고 거듭 언약하지 않았던가?

 

주님은 언약을 어긴 백성들을 내버려두시지 않고, 이민족의 손을 빌려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셨다. 백성들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하느님께 돌아섰고, 주님은 그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가엾게 여겨, 판관(영도자)을 보내어 그들을 구해주셨다. 소위 죄-징벌-회개-구원의 신명기적 도식으로 지나온 역사를 해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 사랑의 역사가 정말 그런 판에 박은 도식(현세적 상선벌악)으로만 설명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 당시는 그것으로 모든 역사를 설명하고 수긍할 수 있을 만큼 자신들의 죄를 의식하고 있었던 것이다.(시대가 흘러 그것만으로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이 물밀 듯이 닥쳐왔을 때 이러한 역사의식은 보완 수정되었다.)

 

한편 복음에서는 부자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묻고 있다.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짐작컨대 그는 당시 종교가 요구하는 충분조건(계명준수)은 다 채우고 있는 사람이었음에 분명하다. 예수님도 일차적으론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청년은 어느 계명이냐고 묻고 있다. 당시는 지킬 계명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613조의 계명).

 

예수께서는 십계명 중에서 다섯 개, 그것도 사람과 사람 간에 지킬 계명만을 언급하고 계시다. 그리고 다섯 개를 종합하듯이, 마지막에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고 덧붙이신다. 독서의 판관기에서(신명기계 역사서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하느님께 대한 계명들은 언급도 하지 않으시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만 하느님에 대한 실질적인 사랑은 바로 ’하느님의 선(善)을 닮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라는 말씀이 아닐까 싶다.

 

십계명은 인간적인 사회를 건설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성별된 삶을 이룩해나가기 위한 최소한의 계명으로써 하느님이 주신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느님 백성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청년은 뭔가 미진한 것을 느낀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는 청년을 영원한 생명의 길, 그 <완전>한 길로 한발자욱 깊이 끌어당기신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산상설교의 말씀,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5,48)를 상기한다면 결국은 아버지 하느님과 같이 되라는 말씀이시다.

 

여기서 우리 모두는 맥이 풀려버릴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부자가 아니라 괜찮다는, 남의 일 구경하는 듯한 태도는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부자청년처럼 혹시 말씀의 뒷 구절만 마음쓰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일 우리가 예수께 같은 질문을 한다면, 앞 구절은 같고 뒷 구절만 달라질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의 본질은 앞에 있다. 즉 계명 준수, 어떤 선행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하느님과 같은 <완전함>,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 해야 한다는 것이 말씀의 본질인 것같다. 사실 우리 신앙인의 목적도 그것이 아니던가?

 

어떻게 완전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완전한 선(善)에 이를 수 있을까?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 모두 하느님과의 합일을 말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죄많고 흠많은 우린 이런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죄의식만 쌓이고, 부자청년처럼 풀이 죽어 그분 곁을 떠나고 싶다.

 

그러나 예수께서 우리의 죄의식만 조장하여, 죄책감만 쌓이게 하는 어두운 그늘을 만들어주고자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답은 이 복음 안에 있다. 우리도 부자청년처럼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렇다. 우리의 목적이 행위 자체에 있다면 우리에게 부과된 어떤 행위를 했을 때, 우리는 자만할 것이며 반대로 그 행위를 하지 못했을 때, 또 그 행위가 턱없이 높이 설정되었을 때, 우리는 늘 죄의식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우리 행위의 목적이 늘 선하신 아버지를 닮고자 한다면, 우리의 관심이 선행 자체, 계명 준수 자체에 있지 않고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배우려하는 열망으로 가득차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우린 누구나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께서는 선한 ’일’에 대해 묻는 청년에게 선하신 ’분’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하신 것인지도 모른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그동안 얼마나 선행을 많이 했는가, 얼마나 완벽하게 계명을 준수했는가 하는 선행의 목록이 나열되어 있는 성적표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린 혹시 선행을 하면서도, 계명을 잘 준수하고 살면서도, 하늘 아버지와 같이 완전해지고 싶은 열망으로 하고 있는지.... 아니면 무엇 무엇을 하고 있다는 외면적 행위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또다른 부자는 아닌지 생각해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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