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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직도 불만?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3-08-20 조회수1,299 추천수10 반대(0) 신고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말씀(판관 9,6-15: 마태 20, 1-16)

 

오늘 복음인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보면 늘 불만스러웠다. 포도원 주인은 물론 하느님이고, 일꾼들은 우리 인간인 셈인데, 나를 보고 옹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콩심은데 콩나게 하고 팥심은데 팥나게 하는 것’이 우리의 정의(正義) 개념이다. 가뜩이나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기에 화가 치미는데, 하늘나라마저 그렇다면 어디에서 위로를 받을 것인가?

 

우리는 이 비유 그대로가 아닌, 우회적으로 돌려서 해석하고, 미화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어보았다. 그럼에도 ’만일 내가 꼴찌에 온 일꾼이 아니라 첫번째 온 일꾼이라면’ 흔쾌히 수긍할 수 없어 마음 속에는 늘 불만의 찌꺼기가 조금은 남아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된 것은 어느 날 TV에서 하루살이 인부들의 ’인력 시장’ 의 풍경을 종일 취재한 다큐멘타리를 본 이후였다. 즉 예수께서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생존의 마당에서 건져내신 예화를 가지고 하느님의 정의(正義)를 설명하고 계신 것이다.

 

인력 시장은 말그대로 하루 일감을 구하러 나온 날품팔이 사람들로 새벽부터 번잡했다. 그들은 연장을 어깨에 둘러메고 자신을 데리고 갈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봉고차가 하나 들어오면 우르르 몰려간다. 봉고차에서 현장감독인 듯한 사람은 일꾼들을 주욱 둘러보자마자 사람들을 골라 차에 싣는다.

 

한 차가 떠나고 다음 차가 들어오면 또 같은 광경이 벌어진다. 새벽이 끝나고, 한낮이 와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젠 더 이상 차도 오지 않고, 며칠 째 공친 사람들은 근처에서 장국 한 그릇도 사먹지 못하고 꽁초만 줏어피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말하나마나 별다른 재주도 없고, 근력도 없고, 병색이 돌거나 늙어서, 일을 시키기엔 적합치 않은 사람들이었다. 카메라는 날이 저물어 힘없이 돌아가는 한 사람을 따라갔다. 다 쓰러져가는 집에는 아이들과 노부모가 빈손으로 돌아오는 그를 맞고 있었다.

 

아, 나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포도원 주인이 어떤 분인지를... 왜 하루 다섯 번, 그것도 해질녁까지 인력시장에서 품꾼을 데리고 왔어야 했는지를... 그분은 하루살이(우리 모두는 그분이 주시는 하루의 생명을 살아가는 하루살이들이다!)들에게 그 날의 생계비(당시 1데나리온)를 똑같이 주셔야 했는지를... 그분의 목적은 <일이 아니었다>. 그분에게 중요한 것은 쓸모가 있는 인간이냐 없는 인간이냐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가 하느님에게 해드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해질녁까지 남아있는 일꾼들! 인간이 쓸모없다고 제쳐놓는 그들은 병자, 장애인, 노약자, 필요없다고 서슴없이 죽여버리는 태아까지 포함된다. 그들이 우리와 똑같지 않다고 굶어죽어야 하는가? 사회에 공헌하는 게 없다고 필요없는가? 그런 때도 있었다. 우수한 혈통만 남겨야 한다고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저 무서운 대학살을 저질렀었다.

 

오늘 독서에서는 왕정의 폐단이 어떠한지를 알려주는 유명한 요담의 ’나무 비유’가 나온다.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주는 과실수들은 모두 왕이 되기를 사양하는데,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가시나무만이 으시대며 왕이 되려고 한다. 왕정제도는 일인지하만인지상의 피라밋구조로, 사람을 억압하며 가시처럼 고통만을 안겨주는 제도라고 요담은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왕정체제는 과연 고대에만 있었던 이미 지나가버린 낡은 유물일 뿐일까?

 

현대는 능력 위주의 성과급제에 의한 피라밋구조가 도처에 형성되어 있다. 사람들을 더욱 더 쓸모와 이용가치로만 평가하는 무한경쟁의 사회! 어떤 의미에선 왕정보다 더 무서운 계급사회로 변해버린 느낌마저 든다. 만일 하느님마저 인간을 일로, 쓸모와 그 효용가치로 심판하신다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아직도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리느냐?’ 고 주님께서는 물으신다. 이젠 솔직해지자. 이 비유를 이렇게 저렇게 둘러대며, 함부로 하느님의 정의를 왜곡시키지 말자. 아직도 먼저 온 일꾼에겐 어떤 보상(현세적이던, 내세적이던, 심리적이던)이 있을 거라고 은근히 기대한다면, 아직도 인간의 정의로 하느님의 정의를(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자비’를 말함이다) 재려는 것이다. 인간이 보살피지 않는 사람들을 하느님<이라도> 보살펴야 하는 것은 너무나 그분다운 일이다. 이제 우리는 겸손되이 그분의 행위에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것이다.

 

오! 주님 저희들의 옹졸한 마음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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