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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무나?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3-08-21 조회수1,582 추천수9 반대(0) 신고

연중 제 20주간 목요일 말씀(판관 11,29-39: 마태 22,1-14)

 

그 날의 독서와 복음을 읽고 연관되는 주제나 이미지를 찾아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오늘의 경우와 같이 전혀 상관없고 어울리지 않게 보이는 대목도 한데 엮어 있기 때문이다. 판관 입다의 이야기와 혼인잔치의 이야기에서 오늘은 왠지 ’아무나?’란 주제가 떠오른다.

 

판관 입다는 ’전투에 이기게 해주신다면 제일 먼저 자신을 맞으러 나오는 사람,’아무나’ 주님께 번제로(몽땅 태워 바치는 제사) 바쳐 올리겠다’는 서원을 했었다. 집 문앞에서 처음 튀어 나온 것은 불행히도 그의 외동딸이었다. 서원대로 딸을 바치는 입다의 슬픔과 의젓하게 순응하면서도 인간적인 고통과 번민을 달래야했던 딸의 심정이 고스란히 독서에 나타나있다.

 

입다는 다급한 나머지 <어리석은 서원>을 자청해서 드렸다. 이 대목은 사실 중대한 일이나 어려운 일을 앞두고 자기가 믿는 신(神)에게 자진해서 서약을 하고 가장 아끼는 사람을 바치던 고대의 종교 관습에서 유래되었다.(어느 나라에건 있다. 심청, 에밀레 종 등) 물론 이스라엘에서는 인신제사는 철저히 금지되었으나(창세기 이사악을 바치는 대목은 간접적 금지다. 2열왕 16,3: 21,6; 23,10; 미가 6,7; 예레 7,30-31참조) 참조 구절들을 보다시피 예언자들의 시대까지도 이런 풍습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복음에서는 아들의 혼인잔치를 거나하게 준비하고 백성들을 초청하는 왕과 그 초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뿐만 아니라 모독까지하는(종들-예언자들-을 붙잡아 때려주고 죽이는) 백성들이 등장한다. 물론 이 이야기는 하느님과 백성사이의 종말론적 잔치를 표상하고 있는 비유이다. 그러니 온갖 <준비를 마친 하느님>과 그것을 거절하고 모독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다.

 

임금은 몹시 노하여 군대를 풀어 그 살인자들을 잡아 죽이고 그들의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 이것은 70년경의 예루살렘 파괴를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눈에는 그 사건이야말로 주님의 징벌로 비쳐졌던 것이다. 이제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데리고 오라 한다. 종들은(사도들은) 나쁜 사람 좋은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대로 데려온다. 그야말로 ’아무나’인 것이다.

 

이 비유에 앞서, ’포도원 소작인의 우화’에서는 유다인들이 거절한 기쁜 소식의 초대가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활짝 열렸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에 응답하고 따라나선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안심해도 될 것인가?

 

손님으로 가득 찬 연회장에 들어선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명령한다. 길거리서 만나는 ’아무나’ 데리고 왔는데 어떤 예복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혼인잔치로 표상되는 ’하느님과 인간의 종말론적인 일치’는 참다운 회개없인 불가능하다. 주님은 혼인잔치의 <준비>를 마치고 초대하고 있는데 우리들은 <아무 준비>도 없이 덜렁덜렁 잔치에 간다? 그 준비란 무엇인가?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기에 합당한 ’회개’인 것이다.(4,17-예수의 선포 첫마디)

 

구원은 ’누구에게나’(선인뿐 아니라 악인에게도) 열려있지만, ’아무에게나’(회개하지 않는 사람도) 열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경고이다. 흔히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에 기대어 종국엔 ’누구나’ 구원해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모든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고 요구할 권리는 없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 두 가지!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 구원<하고자> 하신다는 것! 하느님이 모든 인간(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도)을 구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한스 큉-"믿나이다" 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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