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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 몸같이?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3-08-22 조회수1,145 추천수5 반대(0) 신고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말씀(룻 1,1.3-6.14b-16.22: 마태 22,34-40)

 

이번 주일엔 세 번씩이나 병원에 다녀와야했다. 일년에 한번씩 해야 하는 정기검진과 항암치료 과정의 일부로, 그전에 준비해야 할 특이한 식이요법과 약물요법까지 합쳐 한달 내내 고생하고 나니 여름이 다 간 것같다. 이번 결과까지 잘 나오고 나면 앞으로 두 번만 이 고생을 치르면 소위 안심해도 된다는 등급판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

 

몇 년전 병을 알고나서 씨름하던 화두 중 하나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는 말씀이었다. 그중에서도 그동안엔 도무지 눈에 띄지 않던 부분, <네 몸같이> 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었다.

 

상담심리의 한 방법이라는 ’현실요법’의 기초설문지를 재미삼아 풀어본 적이 있었다. 인간의 욕구를 다섯가지로 나누어보고 그에 맞는 처방을 알아보는 것이라던가? 나의 성향은 자유의 욕구, 즐거움의 욕구, 사랑과 소속의 욕구, 힘과 성취의 욕구, 생존의 욕구 순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가장 마지막이었던 생존의 욕구마저 위의 것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났었다.

 

그랬다. 뒤돌아보면 내가 가장 가치를 두고 살았던 것들이 바로 자유와 즐거움, 성취와 사랑들이었던 것이다. 즐거움과 성취감을 주는 일들, 소속감을 주는 단체들이 우선시되니 자연적으로 체력과는 상관없이 무리한 일들에 쫓기기도 하고, 게다가 약간의 강박적인 성격은 일에 있어서도 세심하게 완벽을 기했고, 만일에 일어날 사태에 대해서까지 꼼꼼히 대비해두며 늘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해 희생되었던 억눌린 자유를 충동적인 여행, 술자리들에서 폭발적으로 해소시키기도 하였다.

 

가장 가치를 두지 않았던 생존의 기반이 무너진 것은 자업자득인 셈이었다. 그동안 망막이 갈라지고, 잇몸이 무너져내리는 신호들을 몸은 충실하게 보내왔는데도, 그것들은 다 무시되고 뒷전으로 미루어졌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암이라는 선언을 받고서야 ’제정신’이 돌아왔지만, ’네몸같이’ 사랑하라던 이웃(가족을 포함)을 사랑할 기운도, 그동안 ’하느님 사랑’의 다른 이름인줄 알았던 ’교회의 일’조차도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십여년간 그렇게 열심히 봉사해왔건만 하느님은(교회는) 아무것도 해준게 없다며 공연히 제 설움에 소외감과 원망만 터져나왔다.

 

오늘 복음에서 어떤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고 묻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 그리곤 묻지도 않는 둘째 계명을 가르쳐주신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한 둘째 계명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시며 두 계명을 다시 한데 묶어 종합하신다. "이 두 계명이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이다."

 

그렇다. 두 계명은 각각의 계명이 아니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이라는 말씀이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이다. 그분은 ’보잘 것 없는’ 이웃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25장) 예수께서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그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남을 사랑할 때, 무리가 따르는 것을 볼 때가 있다. 자기의 욕구를 모두 무시하고 오로지 남을 위해 사는 듯한 희생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자기처럼 그렇게 하기를 바라는 수가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을 보면 한없이 게으른 사람, 이기적인 사람으로 몰아부치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와 이유는 언제나 변명처럼만 들리는 것이다. 오늘 예수께 찾아온 바리사이들도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죄인처럼 보지 않았던가?

 

이웃 사랑에 앞서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고 보살펴줘야 한다.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가장 가까운 이웃, 좀 더 먼 이웃, 그렇게 동심원을 그려나가며 사랑하는 것이 이윽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자신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하느님을 ’마음을 다해 뜻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힘과 목숨과 정성을 다해’ 사랑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병을 얻고서야 바로 그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독서의 이방여자 룻도 시어머니를 봉양할 의무가 없었으나 시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한 여성이다. 과부가 되었음에도 가난함에도 절망하지 않고, 더이상 연결고리가 끊어진 시어머니를, 어머니의 겨레를, 어머니의 하느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16절) 저 사랑의 신비를 터득한다. 이웃에게서 하느님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랑과 하느님으로부터 자기 자신에게로 타고 내려오는 은총의 빗물, 바로 다윗의 후손 메시아는 저 룻의 아들로 아들로.... 이어져 내려왔다. 룻은 예수의 족보에(1,5) 어엿하게 거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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