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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연중23주간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9-12 조회수1,576 추천수5 반대(0) 신고

◎ 2003년 9월 12일 (금) - 연중 제23주간 금요일

 

▣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명 기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성명(聖名) 축일은 16세기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교황 이노첸스 11세(1676-1689)가 터키와의 비엔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감사하는 뜻으로 이 축일을 전 로마교회가 기념하는 축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1970년 전례개혁을 통하여 이 날의 등급을 축일(festum)에서 기념(memoria)으로 낮추었다. 그 이유는 오늘 축일이 마리아 탄신축일(9월 8일)과 중복되는 감이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히브리어의 "마리암" 또는 "미리암"(아론의 누이; 출애 15,20)과 같은 이름으로서 어원(語源)은 이집트어일 가능성이 높다. "마리아"의 이름은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음" 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복음]  루가 6,39-42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39) 예수께서는 또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소경이 어떻게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있겠느냐? 그러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는 없다. 제자는 다 배우고 나도 스승만큼 밖에는 되지 못한다. 41)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도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제 눈 속에 있는 들보도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더러 ’네 눈의 티를 빼내 주겠다’고 하겠느냐? 이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눈이 잘 보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낼 수 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최종 응징은 하느님의 몫

 

  루가복음 6장이 보도하는 예수님의 평지설교는 마태오복음의 산상설교(5-7장)에 비하여 그 분량이 상당히 짧지만, 행복선언(20-23절)과 불행선언(24,26), 원수사랑과 보복금지(27-36절), 형제에 대한 비판금지(37-42절),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고 하였다. 오늘 복음은 형제에 대한 비판을 금지하는 가르침에 해당하는 단락 중에서 이를 부연(敷衍)하는 비유부분을 들려준다.

 

  예수께서는 우선 비판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고, 단죄 받지 않으려거든 남을 단죄하지 말며, 용서받으려거든 남을 용서하라고 하셨다.(37절) 그리고 주면 받고,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38절) 이 말씀을 한마디로 엮는다면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31절)는 황금률로서 이는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주는 대로 받는다는 지극히 당연한 원리는 현세에서 행하는 만큼 내세에서 보상받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동태보상률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비유를 들어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심으로써 종말론적 인과율을 지금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키신다. 즉 현재의 시점에서 행하는 하나의 원인은 반듯이 현세 안에서 원인에 따른 결과가 밝혀진다는 것이다.

 

  이 관점으로 오늘 복음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비유는 세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소경이 소경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과는 둘 다 구덩이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39절) 마태오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소경에 국한시켜 비유하였지만 루가는 이를 보편적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둘째는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제자가 스승으로부터 배울 것을 다 배웠다 하더라도 스승을 능가할 수 없고 스승만큼만 될 수 있다는 것이다.(40절) 참으로 의미심장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들 중 누구도 하느님께서 아들에게 요구하는 그 이상으로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 자비로운 분이시라면 제자들도 그 만큼이면 된다. 그러나 분에 넘치거나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분께서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셨다면, 제자들도 그만큼까지 요구받는다. 그 이상은 아니다. 셋째는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와 자신의 눈 속에 들보의 비유이다.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타인의 눈 속에 있는 티를 꺼내주기는커녕 제대로 볼 수도 없다.(42절) 자신이 허물을 지닌 채 타인의 허물을 논(論)한다면 위선자가 된다. 만약 어떠한 허물도 없는 자라면 그는 타인의 허물을 탓할 그런 소인배(小人輩)는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의 일상은 오늘 비유말씀과 사뭇 다르다. 자신이 소경이면서도 소경의 길잡이가 되려하고, 스승보다 더 나은 제자가 되려고 안간힘을 다 쓰며, 자신이 비록 허물을 가졌다 하더라도 남의 허물을 탓하는 우리들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처지가 용이하지 않다고 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극적으로 살아가는 것보다는 선의(善意)의 비판과 판단, 부단한 노력과 용기는 필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삶의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불의(不義)에 대한 최종적인 응징(膺懲)은 하느님의 몫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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