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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성 크리소스토모)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09-12 조회수1,303 추천수5 반대(0) 신고

◎ 2003년9월13일(토)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349-407)

 

  훌륭한 설교와 위대한 사목으로 "황금의 입"(Chrysostomus; 금구)이라는 별칭을 얻었던 성 요한은 349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모범적 생활에 감동하여 근면하고 성실하게 자라난 요한은 고대 법철학과 설교학을 공부하였다. 369년 세례를 받은 후 속세를 떠나 안티오키아의 근교에 위치한 산 속에서 은수자들과 함께 금욕생활을 하였다. 여기서 성인은 심한 위장병을 얻는다. 386년 사제반열에 오른 요한은 훌륭한 설교로 순식간에 유명세를 타기 시작하였다.

 

  395년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은 거대한 로마제국이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콘스탄티노플을 거점으로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이 역사의 정점에 우뚝 설 무렵, 성 요한은 397년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로 임명되어 제국주의 하에서의 정치적 시련기를 맞이하게 된다. 주교가 된 성인은 우선 가난한 사람들과 병자들을 위하여 구호소와 호스피스 병동을 설립하였고, 이방인지역에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아울러 성인의 사목적 설교와 성서적 주석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허망한 이상에 머물지 않고, 당시 고관과 권력자들의 부요한 생활과 궁중의 허례허식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고위 성직자뿐 아니라 관료 부인들의 사치를 나무랐던 성인의 설교는 황후의 반감을 싸기 시작하였다. 결국 성인은 관료들의 시기와 모략으로 403년 황후 에우독시아에 의해 흑해 동편 아르메니아로 추방된다. 얼마 후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온 성인은 이전보다 더 정열적으로 설교하였다. 407년 다시 한번 유배의 길에 올랐던 성인은 9월 14일 도중에 세상을 떠났다. 성인은 많은 저서와 설교와 성서 주석집을 남겼고, 특히 유배직전에 남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 는 설교는 성인의 삶을 잘 요약하고 있다.  

 

[오늘의 복음]  루가 6,43-49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44) 어떤 나무든지 열매를 보면 그 나무를 알 수 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딸 수 없다. 45)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그 악한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마련이다. 46) 너희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하면서 어찌하여 내 말을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겠다. 48) 그 사람은 땅을 깊이 파고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큰물이 집으로 들이치더라도 그 집은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기초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큰물이 들이치면 그 집은 곧 무너져 여지없이 파괴되고 말 것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행위는 본성을 따른다.

 

  오늘 복음은 루가복음이 짧게나마 보도하는 평지설교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본성을 따르는 행위"(43-45절)와 "말과 행동의 일치"(46-49절)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오늘 가르침은 각각 알아듣기 쉬운 예화, 즉 나무와 열매, 그리고 창고의 비유와 집을 짓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제시된다. 이 가르침으로 루가복음의 평지설교는 일단락 된다. 마태오복음도 집 짓는 사람의 비유(7,21-27)로 산상설교를 끝맺고 있다.  

 

  오늘 복음의 전반적인 구조는 <본성->행위->말>의 흐름을 따르고 있다. 본성은 행위와 일반적으로 일치하지만, 행위와 말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행위와 말의 일치를 예수께서는 요구하신다. 이는 역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구조 <말->행동->본성>의 흐름으로써 말과 행위는 서로 다를 수 있는바, 말을 듣고도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떤 행동을 하던 그 행위는 결국 본성과는 일치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행위(行爲)가 본성(本性)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는 가르침을 <좋은 나무 - 나쁜 나무>와 <선한 마음의 창고 - 악한 마음의 창고> 비유를 통하여 설명하신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기 마련이며, 선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창고(본성)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마음의 창고에서 악한 것을 내놓기 마련이다. 결국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행동, 즉 입 밖으로 나오게 되는 셈이다.(45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속담이 원론적으로 틀린 데는 없지만 어쩐지 김새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너무 운명적이라는 말이다. 아무도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구별할 자격은 없지만 자신만큼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악한 본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악한 행위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너무 절망적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말과 행동의 일치를 도모한다면 악한 본성이라 할지라도 희망은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그 가르침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 행동이 당장은 악한 본성의 회복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것과 같다.(48절) 그러나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맨땅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만다.(49절) 예수님의 가르침(평지설교)을 따르고 실행하는 훈련은 결국 더 나은 본성을 구축하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본성을 탓하고 주저앉아 더 선한 본성을 구축할 수 있는 기회는 놓치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태풍 "매미"로 말미암은 피해가 많아 걱정입니다. 각자 가진 바를 수재민과 나누었으면 합니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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