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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대림1주간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3-12-05 조회수1,812 추천수14 반대(0) 신고

◎ 2003년 12월 5일 (금) -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9,27-31

 <예수를 믿는 두 소경이 눈을 뜨게 되었다.>

 

  27)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소경 두 사람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8) 예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시자 그들은 거기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래서 예수께서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예, 믿습니다, 주님"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29)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뜨이었다. 예수께서 그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셨지만 31)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매일 아침의 기적

 

  마태오는 복음서에서 3번에 걸쳐 예수님의 소경치유기적을 보도한다. 첫째는 오늘 복음으로서(9,27-31), 이는 마태오가 10가지 기적사화를 한데 모아 기록한 기적사화집성문(8-9장)에 위치하고 있다. 둘째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직전 예리고에서 두 명의 소경을 치유하신 기적이다.(20,29-34) 셋째는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신 예수께서 성전 뜰 안에 있던 소경들과 절름발이들을 고쳐주신 기적이다.(21,14)

 

  이에 비하여 마르코복음은 2번의 소경치유기적을 보도하고 있다. 첫째는 베싸이다의 소경치유사건이며(8,22-26), 둘째는 예루살렘 입성 직전 예리고에서 있었던 바르티매오 소경의 치유사건이다.(10,46-52) 두 번째의 경우, 마르코는 예수와 소경 바르티매오와 군중의 삼각관계를 통하여 장황함과 흥미를 곁들여 이 치유사화를 기록하고 있다.

 

  마르코의 소경치유사화를 마태오가 복음편집에 사용한 원전(原典)이라고 본다면, 오늘 복음의 치유사화(9,27-31)는 예리고의 치유사화(20,29-34)와 중복된 것으로 봐야 한다. 그 이유는 세례자 요한이 파견한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하시며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11,4-5)고 하신 말씀 때문에 소경치유사건이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대목을 자연스럽게 기적사화집성문에 넣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성서에서 수많은 기적사화를 대한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께서 하늘로부터 이스라엘백성에게 수많은 기적을 베푸셨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기적을 베푸셨고, 제자들도 예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베풀었다. 초기교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기적은 있으며, 앞으로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기적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기적을 대할 때, 더러는 신나기도 하고, 더러는 빈번한 보도에 식상하기도 하며, 더러는 직접 보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심을 품기도 하고, 이왕이면 나에게도 그런 기적이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적이 기적 자체를 이유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적만이 능사(能事)가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께서도 그러하셨다.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신 후에 단단히 함구령을 내리신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30절) 물론 함구령이 실패한 경우도 있다.(31절)

 

  중요한 것은 기적을 만드는 조건이다. 조건의 제1단계는 기적을 베풀어주실 예수께 자비를 청하는 일이다. 자비를 청하는 일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이다. 제2단계는 자비를 청한 분께 한눈팔지 않고 투철한 신뢰를 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집안에 들어가시자 거기까지 따라가는 것이다. 신뢰는 곧 믿음이다. 믿음은 때때로 "내가 너희의 소원을 이루어줄 수 있다고 믿느냐?"(28절)는 방식의 도전과 시험이 있을 수 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더욱 강한 믿음의 표현이다. 이것이 조건의 제3단계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기적의 주체는 아니다. 단지 원인이 될 뿐이다. 기적의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사람의 청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신다.

 

  기적을 입은 자가 예수께서 내리신 함구령에도 불구하고 기적의 사실을 사방에 알리든 말든 그것은 자신의 자유에 속한다. 예수께서도 이 점만은 어쩔 수 없으시다. 인간의 자유는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오늘도 살아 움직인다는 것이 기적인가? 아닌가? 아니라면 오늘도 그저 어제와 같은 하루이겠지만, 기적이라 여긴다면 오늘은 분명 어제와 다르다. 그래서 사방에 나가 내 삶에 기적이 일어났음을 알릴 수 있는 것도 우리의 자유이다. 기적이 능사는 아니라고 하였다만 매일 우리는 기적 속에 산다. 감았던 눈을 아침에 다시 뜨는 것이 바로 기적이다. 중요한 것을 기적의 의미를 깨닫고 이를 기쁨과 감사의 근거로 다양하게 선포하며 사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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