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유년기 성화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3-12-18 조회수1,429 추천수9 반대(0) 신고

독서: 예레미야 23,5-8

복음: 마태 1,18-25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유년시절은 그분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글자로 그려낸  성화이다. 예전에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보면서 그분이 입고있는 고급스러운 옷과 주변환경을 보고 의아했었다. 가난하고 소박한 아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이기 때문에 통 정이 가질 않아 불만이었다.

 

그러나 화가가 그 그림을 통해서 존귀하고 고결하신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표현하고 싶은 것이지 사실 그대로의 초상화를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며 성화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유년기 사화도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복음사가의 신앙을 표현했다는 것을 이해할 때 세세한 부분의 의미를 잘 알아들을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복음사가가 표현하고 싶은 핵심주제는 무엇일까?

1. 그리스도의 탄생은 요셉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2.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3. 그분의 이름, ’예수’가 말해주듯 그분의 사명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4. 이 모두는 성서 예언의 성취라는 것이다.

나머지의 세세한 상황설명, 예를 들면 요셉의 심리상태, 마리아 동정성의 기간등은 이를 강조하기 위한 부수적인 여건들이지만 때때로 우리에게는 그것이 더 흥미있게 여겨지기도 한다.

 

  어제의 복음인 마태오 복음을 시작하는 1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탄생, 족보)의 책"(직역)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고,

오늘 복음 시작인 18절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기원(탄생)은 이러했다"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두 대목의 시작이 모두 ’기원’이라는 창세기의 제목인 Genesis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탄생 안에 드러나는 창조주 하느님의 업적을 보여준다.

 

   요셉은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법대로 소박하기로 작정하였는데 그렇게 되면 공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이기에 사실 ’남몰래’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남몰래’라는 말을 첨부한 것은 그의 마음이 복수심에 차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 어떻든 요셉의 인간성은 그렇게 순한 사람이었고, 그런 그의 면모는 단지 꿈 속에서 만난 천사의 말을 듣고서도 그대로 순명했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순하고 의로운 요셉의 순명이 하느님이 인간으로 세상에 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준다. 이제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가 오기 위한 준비가 요셉의 어리숙한 순종에서 비롯되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입양을 통해서도 완전한 부자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양자도 친자와 다름없이 집안의 모든 권리를 보장받았다.

아기의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고유한 책임이었으나 그마저도 천사가 알려준 이름을 붙여주어야 했다. 요셉은 무엇하나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다.

 

   ’예수’라는 이름은 ’여호수아’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세의 계승자인 ’여호수아’를 상기시킨다. 여호수아는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이름 안에 보다 풍부한 뜻이 드러난다. 즉 "사실 그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내어"(21절) 우리가 꿈꾸는 영원한 복지, 그 약속의 땅으로 이끌고 가실 분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백성을 고향으로 되돌아오게 하고야 말리라."(독서의 말씀)

그러니까 예수는 새로운 모세이며 새로운 여호수아라는 말이 아닌가.

 

   이러한 유년사화 속의 신앙고백은 단지 복음사가의 감상적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 때부터 예언된 일이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는 기원전 8세기의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제서야 실현되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오늘 독서에서도 예레미야 예언자는 암흑기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주님, 우리를 되살려주시는 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를 날이 온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제 그 날이 오면 출애굽때의 역사만 돌이켜보며 과거의 업적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되살려주시는 새로운 출애굽의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과거가 아니라 항상 현재로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역사, 그것은 진정 ’임마누엘’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또 다른 이름인 ’임마누엘’을 복음서 초입에 알려주면서 복음서 끝에 다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하는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임마누엘의 권능이 이제 모든 민족들에게 알려질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11,10)이기도 하다.

 

   ’다윗의 자손’에게 메시아가 탄생하리라는 ’나단’의 예언도, 동정녀에게 잉태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예언도, 새롭게 백성을 구출하리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도, 그리고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을 하느님이라는 예언자들의 한결같은 약속이

모두 예수에게서 실현되었다.  

 

  그리스도는 구약의 모든 역사와 대망을 짊어지고 한 순진한 시골처녀의 가녀린 몸에 잉태되었다.

그리고 전능하시며 굳건하신 하느님 약속의 실현은 한 어리숙하고 순한 믿음의 사람 안에서 잉태되었다.

오늘, 영약하고 약삭빠른 세상, 현대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발붙일 곳은 있을까?

 

주님, 대림시기, 제 마음에 당신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비오니...

잃어버린 순수, 어리숙하고 선한 마음, 순명하는 마음을 먼저 되찾게 해 주십시요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