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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1-09 조회수1,492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 1월 9일 (금) - 주님 공현 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루가 5,12-16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12)예수께서 어느 동네에 계실 때에 온몸이 나병으로 문드러진 사람 하나가 나타났다. 그는 예수를 보자 땅에 엎드려 간청하며 "주님, 주님께서는 하시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이 고쳐 주실 수 있으십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그렇게 해 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하시자 곧 그의 나병이 깨끗이 나았다. 14) 예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말고 다만 사제에게 가서 몸을 보이고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네 몸이 깨끗해진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15) 그러나 예수의 소문은 더욱더 널리 퍼져서 예수의 말씀을 듣거나 병을 고치려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떼지어 왔다.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때때로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를 드리셨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지금 그리고 여기

 

  루가는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을 어느 시점과 어느 장소에 제한하여 보지 않고 언제나 "지금과 여기"로 보았다. 기도와 성령의 능력으로 집약된 예수님의 지금과 여기에서의 복음선포와 활동이 곧 그분의 공생활이며, 이 공생활은 바로 구원의 행위로서 언제나 "지금과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루가복음에서 "지금", 그리고 "여기" 라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개념으로 존재하는 메시아의 구원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루가에 의하면 메시아의 구원은 어제 존재하였거나 내일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의 구원은 늘 <지금과 여기>에 존재하며, 그것도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實存)한다. 실존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주변의 것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만 골라서 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내가 나의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관계를 가짐으로써 나는 실존하게 되는 것이며, 주변의 존재 또한 나와의 관계를 통하여 실존하게 된다. 그저 존재함은 의미가 없다. 무엇이든 실존할 때 의미를 가지며, 존재해야 할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메시아의 구원 또한 독자적으로 존재할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주변과 관계를 맺고 실존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가지며, 효력을 가지는 것이다.

 

  나병환자들, 이는 자신의 피부병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철저하게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이 더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다. 사람이 병을 얻어 육체적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로부터 간호라도 받는다면 그나마 행복한 처지이니 아쉬워할 것이 적다. 그러나 나병에 걸려 공공연히 "부정(不淨)한 자"로 낙인찍혀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소외되어 살아야 하는 아픔은 육체적 고통에 심리적 고통까지 더하는 설상가상(雪上加霜)의 아픔이다.(레위 13-14장 참조) 예수께서 참다운 메시아이시라면 이러한 처지의 나병환자에게 첫째, 병의 치유와 둘째, 관계의 회복, 둘 다를 선사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메시아의 구원은 나병환자에게 직접 손을 대는 공존(共存)의 관계를 통하여 치유와 실존을 함께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메시아적 구원은 "지금과 여기" 라는 현실을 파고들어 새로운 관계의 실존을 구원의 대상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인도에 복음이 선포된 것은 1500년대 일이었다.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가 활약할 당시만 해도 인도는 유럽의 열강들이 선호하는 정열의 선교지역이었으나 17세기초부터 유럽교회 내부의 문제로 선교의 열정은 수그러들고 인도는 영국의 지배에 들게 된다. 1813년 영국령 인도가 선교사들에게 문호를 개방하면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 1885년에 인도에 도착한 메리 리드(Mary Reed)의 이야기를 잠시 소개할까 한다. 메리 리드 선교사는 본국을 떠나 인도에서 그리스도의 선한 사업에 힘쓰고 있었는데, 그녀는 한가지 고민으로 가슴아파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불쌍한 처지에 있으며 비참한 생활을 해 나가는 나병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는 나병 환자를 구제할 변변한 방도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메리 리드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는데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나병환자 수용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병은 전혀 낫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선교를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가 정밀 검진을 받게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그녀의 손가락은 점차 감각을 잃었고 얼굴에는 반점 하나가 생기더니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의사는 그녀의 질병이 무엇인지 알아냈다. 그녀는 나병에 걸린 것이었다. 이 사실을 메리 리드도 알게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녀가 얼마나 가슴 아파할까 하는 안쓰러움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메리 리드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하느님, 제게 나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는 인도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도에 있는 나병 환자들을 도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메리 리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어 그녀의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였던 인도의 나병환자들에게 돌아가 1943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들을 위해 그들과 함께 살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 그리고 여기"에 살아 있는 메시아적 구원의 힘이 아닌가 생각한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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