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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연중1주간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1-16 조회수1,571 추천수7 반대(0) 신고

◎ 2004년 1월 16일 (금) -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르 2,1-12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

 

  1) 며칠 뒤에 예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가셨다. 예수께서 집에 계시다는 말이 퍼지자 2) 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마침내 문 앞에까지 빈틈없이 들어섰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계셨다. 3) 그때 어떤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들고 왔다. 4)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께서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를 요에 눕힌 채 예수 앞에 달아 내려보냈다. 5) 예수께서는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셨다. 6) 거기 앉아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7)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중얼거렸다. 8)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알아채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거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10)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병자에게 11) "내가 말하는 대로 하여라.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12) 중풍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떡 일어나 곧 요를 걷어 가지고 나갔다. 그러자 모두들 몹시 놀라서 "이런 일은 정말 처음 보는 일이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주신 후 며칠이 지나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오셨다. 가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 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께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도구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과 용서이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께 내려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고, 또 고쳐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 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죄(罪) 때문에 병(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부정(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로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도 속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백성사를 배령하기보다 불편한 몸이 좀 나아지기를 바라거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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