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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연중2주간 월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1-19 조회수1,534 추천수8 반대(0) 신고

◎ 2004년 1월 19일 (월) - 연중 제2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마르 2,18-22

<신랑이 신랑 친구들과 함께 있다.>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9)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칫집에 온 신랑 친구들이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단식을 할 수 있겠느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그럴 수 없다. 20) 그러나 이제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온다.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다." 21)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겨 더 찢어지게 된다. 22)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축제와 단식의 긴장감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시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다.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될 것인가?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된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레위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마르 2,16)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준다. 단식(斷食, fasting)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은 그 어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오직 구원과 축제의 현재만 있으므로 단식이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께서 안 계신 동안에 제자들은 신랑을 빼앗긴 신부처럼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슬퍼하며 단식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성취된 구원의 시대를 기뻐하면서도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에 있으면서 축제와 단식의 긴장 속에서 세상과 인간의 구원을 위한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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