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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 (프란치스코 드 살)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1-24 조회수1,461 추천수11 반대(0) 신고

◎ 2004년 1월 24일 (토) -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 성 프란치스코 드 살(1567-1622) 주교 학자

 

  프란치스코는 1567년 프랑스의 사보이아 지방(스위스와의 국경지역)에 있는 자기 가문 소속의 성(城) ’살’에서 10명의 자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어릴 적 유학 길에 올라 클레르몽 예수회 학교를 다녔고, 외교사절을 꿈꾸며 파리와 파두아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24살에 법학박사가 되었다. 파두아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예수회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신학을 공부하고 영성생활에 관심을 가졌다. 결국 후자(後者)를 이유로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593년 사제로 서품되었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가들로 말미암아 혼란스러웠고, 특히 스위스의 제네바 교구는 교회의 모든 것을 극단적 개혁가들에게 빼앗기고 프랑스의 에네시(제네바와 리용 사이에 위치)에 임시교구를 구성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에네시에 있는 제네바 교구 소속 사제로 서품되었던 것이다.

 

  성인은 교구관할지역에 해당하는 스위스 서쪽 싸블레 지방에서 5년 동안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그곳 가톨릭신자들과 함께 과격 칼뱅교도의 박해와 암살행각에 맞서 신앙을 지켰고 많은 주민들을 개종시켰다. 1602년 제네바의 주교로 임명되었을 때 성인은 이미 당대 최고의 반종교개혁적 지도자가 되어 있었다. 성인은 1622년 리용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박한 신학지식과 뜨거운 영성을 지닌 주교로서 말과 글로 선교한 훌륭한 사목자, 교육자, 설교자였다. 1604년부터 성 프란치스카 드 샹탈(1572-1641)의 영적 지도를 맡았던 성인은 1610년 그녀와 함께 ’성모방문수도회’(여자 살레시오회)를 설립하였다. 《신심생활 입문》(1609년)과《신애론》(1616년)은 성인이 남긴 유명한 저서이다. 성인의 시복은 세상을 떠난 직후 거행되었고, 1665년 교황 알렉산더 7세에 의해 성인반열에 올랐다. 1877년 교회 박사로, 1923년 가톨릭 언론의 수호성인으로 선언되었다.

 

[오늘의 복음] 마르 3,20-21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20)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에 돌아오시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서 예수의 일행은 음식을 먹을 겨를도 없었다. 21) 이 소식을 들은 예수의 친척들은 예수를 붙들러 나섰다.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복음산책] 외로운 진보의 길

 

  일년 중 가장 짧은 복음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막상 오늘 이런 대목이 ’복음’으로 봉독될만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그러나 오늘복음도 복음(福音)이다. 문맥상의 뜻을 살피기는 좀 어렵지만 내용은 간단하다. 산에서 선발하여 뽑아 세운 12제자를 데리고 예수께서 다시 산을 내려오시어 집으로 가셨다. 여기서 집은 가파르나움에 있는 시몬의 집을 말한다.(1,29; 2,1) 그런데 예수께서 집에 오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또 다시 모여들었다. 예수께서는 모여든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그들의 필요한 청을 들어주셨을 것이며, 제자들은 스승 곁에서 시중을 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음식을 먹을 겨를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이 미쳤다는 소문과 함께 가파르나움에서 45Km 정도 떨어진 예수의 고향 나자렛의 친척들에게 전해졌을 것이고, 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서 예수를 붙들어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12제자의 선발은 마치 주교서품식이나 사제서품식과도 같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가 사제서품을 받았던 날(1988년 2월 6일)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혼미하다. 다음날 첫미사를 마치고도 한참 지나서 축하식장에 참석해 겨우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사실 그 때는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 몰랐다. 서품식과 첫미사를 마치자마자 첫강복(benedictio prima)을 받을 신자들의 줄은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졌었고, 정성껏 강복을 베풀던 필자는 결국 중간에 붙잡혀갔다. 그러나 그 때 ’미친’ 일을 하다가 붙잡혀 간 것은 아니다. 아무튼 지금도 서품식과 첫미사의 날은 생애 최고의 기쁨과 은혜의 날로 기억된다. 어찌 나의 날들을 예수님의 날들과 비교할 수 있으랴.

 

  우리가 식음을 전폐하고 어떤 일에 몰두하면 ’정신이 나갔다’거나 미쳤다’는 말을 듣게된다. 또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종종 ’미쳤다’는 말을 듣게된다. 주지하다시피 예수님의 도래는 새로움의 시작이요, 그분의 활동은 새로움의 연속이다. 예수께서 몰두하시는 일은 기존의 관습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와 관계를 세우는 것이다.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도 바로 이런 맥락으로 이해된다. 예수를 미쳤다고 보는 생각은 결국 당시 예수를 반대하거나 외면하는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예수의 인척과 친척들도 예수를 오해하고 불신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있다. 그들은 예수의 반대자들이 백성의 지도층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었을 것이고, 이는 곧 가문의 명예와도 직결되는 것이었다. 진보(進步)와 보수(保守)는 공존(共存)하기 힘들다. 예수님의 진보적 행보(行步)에 모두가 동감하고 동참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분명히 과욕이다. 진보는 늘 외로운 길이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 길을 묵묵히, 그러나 자신 있게 가실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 또한 외롭고 쓸쓸한 길이 될 수도 있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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