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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산책(재의수 다음 금요일)
작성자박상대 쪽지 캡슐 작성일2004-02-27 조회수1,500 추천수12 반대(0) 신고

◎ 2004년 2월 27일 (금) - 재의 수요일 다음 금요일

 

[오늘의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자 15)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복음산책]  단식은 절제를 절제는 겸손을 준다.

 

  사순절에 필요한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단식이다. 단식은 절제를 말하며 절제는 겸손을 가져온다. 단식(斷食, fasting)은 본래 일정 기간 동안 종교·수행(修行)·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이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이다.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다.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킨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다.(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新約)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마르 1,6; 마태 11,19; 루가 18,12)

 

  따라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제자들이 행한 금욕생활과 단식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것이며, 도래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면 그것은 곧 예수님을 위한 것이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에 비유하신다.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哭)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이 와서 슬퍼하거나 아무 것도 먹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이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이다.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예수께도 단식은 있으며,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하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는 시기에 행하는 단식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오며, 신랑을 잃게되는 그때는 더욱 더 큰 슬픔과 단식이 있을 것이다.  오늘 금요일에 벌써 성금요일 십자가상 한 장면이 번득 눈앞을 스치는 듯하다. 단식이 자선과 기도와 더불어 사순시기의 중요한 수행덕목이긴 하나 ’단식’이라는 수행자체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단식은 분명히 ’음식섭취’를 중단하거나 조절하는 일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물자가 풍요로와 먹는 일을 낙(樂)으로 삼고, 단식을 몸매관리의 방편으로 이용하는 시대에 단식의 정신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단식의 정신의 절제이다. 절제(節制)는 방종에 흐르지 않도록 감성적 욕구를 이성으로 제어하는 일이 아닌가? 절제는 9가지 성령의 열매(갈라 5,22) 중의 하나로서 어쩌면 단식보다 더 중요한 덕목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방치하는 무절제함의 피해는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부분에 드러나고 있다. 그 중에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참으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자연의 파괴는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고 결국에는 인간세상의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따라서 창조질서와 생명을 보전하는 일과 현대 물질문명의 편리함을 절제로서 관리하는 일은 비단 사순시기뿐 아니라 일상(日常)의 덕목으로 제고(提高)되어야 할 일이다. 이는 곧 신앙인 모두가 부여받은 사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절제된’ 삶을 사는 것이다. 1991년에 개최된《창조질서 보존 및 완성을 위한 공청회》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오늘날 만연된 자연파괴는 인간의 오만과 탐욕에 보다 근원적인 원인이 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오만과 탐욕의 감성적 욕구를 제어하는 데는 겸손함이 약이다. 겸손은 절제의 정신으로 닦이고, 절제는 식탐을 조절하는 수행으로도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니 단식 또한 겸손의 시작이요 생명사랑의 첫걸음이다.◆[부산가톨릭대학교 교목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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